하우메 플렌자 (Jaume Plensa) | 무형의 시학(Jaume Plensa_The Poetics of the intangible)

Text by 최유진

공간을 경계 짓는 예술적 행위가 건축이라고 믿는 필자에게, 사적 공간 혹은 공적 공간에서의 예술은 단지 장식적인 요소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공간은 참여와 소통, 시간과 역사성을 텃밭으로 한 삶의 다양성을 담고 있으며, 예술을 매개로 한 사람들의 커뮤니티(사회성)를 포함한다. 또한 현재 거주하는 구성원의 기억이나 쟁점, 요구들이 뒤섞여 있을 뿐만 아니라, 아주 오래전부터 그곳에 의존한 채 생을 잇고 있는 이들에 의해 공유되어온 흔적들이 깃들어 있기도 하다.

따라서 건축과 예술 간 소통을 화두로 하기 전, 우린 무엇보다 우리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공공미술’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앞서 기술한 ‘삶의 흔적들’은 공공미술이라는 테제를 통해 새로운 생명력을 만들어가고 미래의 시공간으로 ‘미끄러지듯’ 연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공공미술의 시작은 소위 ‘환경조형물’로부터 비롯됐다. 환경조형물은 1972년 처음 문예진흥법이 제정될 당시 권장사항으로 출발해, 1995년 대통령 선거 공약사항으로 선정, 1997년 이후 동법 의무사항으로 개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미국 공공시설의 건축 속 예술프로그램과 프랑스의 1%법을 벤치마킹한 이것은 한때 프랑스처럼 총 건축비의 1%를 미술작품에 사용하도록 했으나 설치의무자인 건축주들의 재산권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지난 2000년 기존 1%에서 그 이하로 완화되었으며, 2011년 민간 건물 신축 시 건축주가 의무적으로 이행해야만 하는 미술작품 설치비용을 문예진흥기금으로도 출연할 수 있도록 관련법을 개정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때 ‘미술장식품’이라는 협소하고 시대착오적인 용어 대신 ‘공공미술작품’으로 대체되기도 했다.

하지만 ‘미술장식품’이 ‘공공미술작품’이란 명칭으로 바뀌었어도 여전히 우리의 공공미술은 사회공동체에 존재한다는 것을 망각한 채 도심 속 흉물로 자리 잡고 있다. ‘공공미술’이 개인적, 사회적 가치를 극대화 시킬 수 있는 예술가의 미학적 접근과 이를 공간에 효과적으로 대입시키는 건축주의 안목, 공공성에 기반을 둔 사회적 책임이 필요했지만 결과적으로 썩 만족스러운 결론을 도출시키진 못했다.

<nuria and irma>, 2011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공미술’이 지닌 본질은 예술평등과 감상의 공유라는 명제를 옹립시킨다. 그 네 음절 속에 깃들어 있는 ‘공동체’에의 주목과 ‘공공성의 실현’은 현재에도 유효할 뿐만 아니라, 그곳으로부터 발현된 예술은 유희적, 심미적 접근뿐만 아니라 정서적 안정과 유, 무형의 소통을 통해 삶의 질을 높여주고 예술이 우리의 삶에 왜 존재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해답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차원에서 볼 때 오늘 본란에 소개할 작가 ‘하우메 플렌자(Jaume Plensa)’는 ‘공공미술’의 가장 근원적인 의미를 구현하는 작가로 손색이 없다.

1955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출생한 ‘하우메 플렌자’는 첫 전시를 미로미술관(Fundació Joan Miró, Barcelona, Spain, 1980년)에서 개최하는 행운을 누렸고, 이후 매년 3~6회씩 세계 여러 곳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다. 자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 그는 미국, 독일, 영국 등에서 공공미술, 드로잉, 조각 작업을 선보이며 주목받고 있다.

지금도 하우메 플렌자의 작품은 예술이 사람들과 어떻게 교감하고 소통하는지 직설적으로 보여주며 미술과 사회, 사회와 공공장소 사이의 대화를 강조하는 새로운 공공미술(new genre public art)의 원형에 따라 늘 새로운 작업으로 도출된다. 그의 작품이 들어선 곳마다 세계 미술계의 화제가 되고, 지역 주민들의 자부심으로 자리매김 되곤 한다.

그러나 그를 세계적인 작가로 거듭나게 한 작품은 <크라운 분수대>(2004)로, 시카고 밀레니엄 파크를 찾는 많은 시민들에게 휴식과 즐거움을 제공하며 랜드마크로 자리 잡았다. 플렌자에 의해 디자인 되고 시카고 주민들의 아이디어에 의해 만들어진 이 분수는 LED스크린에 시민 1000명 얼굴이 13분마다 번갈아 나타나는 참여형 예술, 즉 ‘공동체’에 주목하고 ‘공공성의 실현’에 목적을 두는 방향에서 완성되는 ‘미술적 가치의 실현’을 이룬 작업이랄 수 있다.

 

하지만 <크라운 분수대>의 초기 작업은 순탄치 않았다. 계절의 변화를 알리는 시계이자, 분수가 다시 작업을 시작하면 봄이 시작된다는 내용을 신문에 발표할 만큼 명물이 되었지만 4년 6개월간 정부를 설득해야 했으며 분수대를 설치하는 건축 작업과 정밀한 기술팀과의 오랜 협업의 결과였다. 물론 주민들의 적극적인 관심이 없었다면 실현되지 못할 공공미술이었다.

뉴욕 메디슨 스퀘어 공원에 위치한 14m의 대형 거대한 두상 조각 <ECHO>(2011)는 기술적으로 도저히 설치 불가능 할 것으로 보였지만 조각을 분리해 이동시켜 조립하는 방식으로 성공한 프로젝트로 손꼽힌다. 이 프로젝트는 2011년 5월 5일 뉴욕타임즈(The New York Times) 한 면에 『기념비: 꿈의시(Monuments: The Poetry of Dreams』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는데, 당시 그는 “작품을 구상할 때 기술적인 해결 방법도 함께 확인하는가?”라는 카롤 키노(Carol Kino) 기자의 질문에 “사전에 기술적인 부분을 생각하면 문제가 생긴다. 꿈을 꾸고 난 후, 구현 할 수 있는 해결책을 찾으면 된다.”고 대답해 자신의 예술적 가치관의 목적은 기술에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 아이디어를 표현하기 위해 필요한 도구일 뿐임을 피력한바 있다. 이는 달리 말해 공공성을 밑동으로 한 조각이란 태도의 문제이지 형식이 아님을 지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우메 플렌자는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예술가들의 작품은 당대의 현대미술이라 생각하기에 자신을 어느 형식이나 장르에 규정짓는 것을 불편해 한다. 미술이 직접적인 공공에 개입하여 주민들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며 미술이 일상에 녹아 미적 정서를 고취시키는 역할을 한다면 일단 공공기제로써의 공공미술의 기능성, 정체성은 확보될 수 있음을 믿는다. 그렇기에 소수만이 방문하는 화이트큐브에서의 전시가 아닌, 사람과의 관계를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고, 자신의 작품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을 통해 작품이 살아나는 공공장소에서의 설치를 선호한다.

<Crown Fontain>, 2004

<Conversation a nice> 2007

허나 그의 작품에 있어 가장 큰 특징은 누구나 예술을 자유롭게 향유할 수 있고 기억을 그리드(Grid)할 수 있는 공공공간을 배경으로 한다는 점이며, 밤이면 새로운 영혼이 살아 나오는 것처럼 보이는 기법을 주로 사용한다는 사실에 있다. 실제로 그가 자주 애용하는 ‘white box’ 라이트는 사람을 주로 표현 소제로 삼는 그의 작품을 보다 매력적으로 만드는 알고리즘이 되고 있다.

예술가는 공공미술을 할 때 가장 겸손해 지는 것 같다. 19세기 이후 오랜 시간 점유해온 작가 자아와 연관된 에토스(Ethos)가 자연스럽게 확장될 수밖에 없는 탓에 갤러리나 미술관에서의 전시와는 달리 타자들이 제한 없는 사유의 흐름에 동참할 수 있도록 개방하며, 예술과 소통하고 또 다른 생명력을 부여하게 되므로 그 어느 때보다 스스로를 겸양해진다. 이는 무의식적으로 예술이 단지 보이는 것, 그리는 것, 묘사하는 것, 대상을 밝히는 것에 국한되지 않고 그 이상의 높은 차원으로 관객을 유도하는 장치로써의 힘을 수용하는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

필자는 창의적인 예술을 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으로 직관력과 감각을 꼽는다. 로고스(logos)적이기 보단 어떤 불명확함에서조차 흔들림 없는 파토스(Pathos)적인 것이라 여긴다. 따라서 작가의 성장과정과 경험에 덧대어 직관력과 감각은 그 어떤 이성이나 지식보다 중요하며 창조의 기본이랄 수 있다. 하우메 플렌자는 그 모든 것에 일체감 가득한 밸런스를 보인다. 물론 그에게도 영향을 미친 선배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우메 플렌자가 추구해온 공공의 예술 뒤에는 현대미술의 아버지라 불리는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과 천재 물리학자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이 존재하고 있다. 실수를 신경 쓰지 않고 생각하는 것들을 실험하고, 계속 무엇인가 탐구하며 끝없이 노력했다는 부분이 작가에겐 실천력과 아이디어의 원천이었던 셈이다.

이와 관련해 하우메 플렌자는 ‘ArtFutura festival’ 기간 중 바바라 샌손(Barbara Sansone)과의 인터뷰에서 “작가로써 창의적인 예술작품을 만드는 것은 신비하며 환상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실수를 하는가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해서 무언가를 위해 일을 하는 행위이다. 자신을 믿고 실수에서 우연을 찾아내는 것이야 말로 흥미로운 일이며 끝임 없이 시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난해하지 않으나 사고를 유발하는 언어 아래 묵직함이 내재되어 있는 이 발언은 그의 작품들이 확실히 존재만으로 침묵과 무형의 시를 전달하는 힘을 지니고 있음을 읽도록 한다.

 

한편 그의 대규모 프로젝트가 오는 2016년 3월말 서울 퍼블릭파크에서 선보였다. 모르긴 해도 하우메 플렌자의 작품을 사랑하는 문화예술 애호가들은 물론 많은 시민들 역시 공공미술의 참다운 의미를 비롯해 뜻밖의 여유와 낭만을 체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Together> 2014

<world voices>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