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전시일정 | 2017. 12. 9 ~ 2017. 12. 19

전시장소 | Space ARTWA

                서울시 용산구 두텁바위로 60길, 49 대원빌딩 본관 3층
관람시간 | 월~토 Open 10:00 ~ Close 18:00 (일 휴무)

전시문의 | 02 - 774 - 7747  

“작품 구석마다 숨어있는 비움으로써 채우고 채워짐으로써 비워내는 공진의 과정들은 자발적으로 건져 올린 내적인 이미지가 어떤 방식으로 공명의 수위를 지나 공(空)의 개념으로 나아가고 있는지를 어렴풋이 보여준다. 공(空)이란 본디 공명을 발판으로 한 의식의 실천이랄 수 있음을 뜻하고, 작가는 그것에 여러 현실적인, 혹은 시공의 잔상이 남긴 의미들을 덧씌우지만 그것이 형식을 통해 직관적인 지력위에서 활성화 되어있을 뿐 그 자체가 전부는 아니다. 그렇기에 백가령이 언급한 ‘공백의 풍요로움’이란 어떤 의미의 조립에 있어 채움의 결핍을 역으로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게 바람직하다."

- 홍경한 미술평론가 <채움의 결핍, ‘아나크네(Arachne)의 빛’> 중 -

백가령 개인전

[아나크네의 빛]

아나크네의 빛 (Edition 1/5) Metal Printing 2017

아나크네의 빛 (Edition 1/5) Metal Printing 2017

아나크네의 빛 (Edition 1/5) Metal Printing 2017

아나크네의 빛 (Edition 1/5) Metal Printing 2017

아나크네의 빛 (Edition 1/5) Metal Printing 2017

아나크네의 빛 (Edition 1/5) Gelatin Silver Print 2017

아나크네의 빛 (Edition 1/5) Pigment 2017

텅 빈, 부재를 비추는 거울

​백상현 교수

 

“진정한 삶은 다른 곳에la vraie vie est ailleurs”라는 문장은 시인 랭보가 했다고 알려진 말이다. 밀란 쿤테라는 이 문장을 제목으로 장편소설을 쓰기 까지 했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랭보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을 뿐이다. “La vraie vie est absente. Nous ne sommes pas au monde 진정한 삶이란 부재하며, 우리는 세상에 있지 않다-고. 어째서 이런 와전이 일어난 것일까? 어째서 부재absente와 다른 곳ailleurs이 혼동된 것일까? 라는 질문이 제기될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 이런 혼동이 쉽사리 이해되는 것 역시 사실이다. 왜냐하면, 부재란 지금 여기 없음을 말함으로써 절망의 감정을 느끼게 하지만, 또한 그러한 절망이 우리를 다른 곳에 존재할 지도 모를 희망의 장소로 떠미는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삶이 지금 여기 없는 것이라면, 다른 곳에 있을 것이라 희망하게 된다. 그러한 소망은 허위로서의 삶이 그럼에도 몰락하지 않고 지속될 수 있는 힘을 발휘한다. 지금 이 순간, 오늘의 삶에서 진실을 발견할 수는 없을 지라도 내일 또는 다른 곳에서 그것과의 조우가 가능할 지도 모를 것이라는 소망이, 마치 위태로운 촛불처럼 꺼지지 않고 지속되도록.

 

백가령의 사진 작품들은 이 같은 우리의 소망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환멸을 경험하게 한다. 그녀의 작품은 부재를 이미지화 하고 그것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주는 상당한 하중을 관객의 시선에 강제하기 때문이다. 빈 접시와 식기들. 차창 밖으로 스치는 텅 빈 풍경의 익명성. 나의 존재보다 더 현실적으로 보이는, 나의 부재를 비추는 손거울 속의 허상. 허무 그 자체가 파도처럼 일렁이는 바다. 그녀의 작품들이 보여주고자 하는 세상의 풍경은 모두 텅 빈 것들의 역설적 풍요로움이다. 어디에나 편재하는 부재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삶의 무의미를, 침묵에 다름 아닌 그것을 발음하는 실어증의 이미지들. 또는, 이미지의 거식증이라 해도 좋을 핍진함이 가득한 세계가 그곳에 있다. 이토록 우울한 세계를 드러내고자 하는 작가의 욕망이 관객인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욕망할 만한 색과 형태를 남김없이 앗아가는 방식으로 촬영된 사물들의 이미지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욕망할 수 있는가? 절망일까? 작품은 자신이 도달한 환멸의 장소에서 함께 소멸할 것을 요구하는가?

 

백가령의 작품이 가진 힘은 우리의 이 같은 질문과 망설임을 단번에 정지시키는 매혹이다. 작품 앞에 선 관객은 더 이상 질문하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 부재에 취할 뿐이다. 존재의 가벼움이 주는 거대한 무게의 짓눌리는 역설적인 쾌락에 심취하게 된다. 그것은 세계의 환상에 대항하는 또 다른 환상이지만, 자신이 환상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 부조리한 환상이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음으로써 발생하는 허무의 무게로 관객의 망막을 지긋이 압박하는 기이한 환상. 그것은 T. S. 엘리엇의 시에서처럼 우리를 “붉은 바위 그늘로” 들어오라고 유혹하는 죽음의 이미지이며, 그런 다음에는 “아침 네 뒤를 따르는 그림자나, 저녁에 너를 맞으러 일어서는 네 그림자와는 다른 그 무엇을 보여주리라”고 말하는 이미지이다. “한 줌의 먼지 속에서 공포를 보여주리라”고 말하는. 프로이트가 탐닉했던 낯익은 낯설음Uncanny의 공포가 그곳에 있는데, 우리는 그것에 취한다. 가장 진실한 거울이 그러하듯이 우리의 부재를 비추는 백가령의 작품 앞에서 우리는 텅 빈 것의 무게에 눌리는 쾌락을 탐닉하도록 초대된다. “진실한 삶이란 부재한다”는 치명적 사실을 온전히 수용하도록 만드는 기이한 매혹이 그곳에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계의 환상이 몰락하면, 그런 다음 각자의 삶이 새롭게 시작될 수 있도록, 각자의 작은 환상들이 다시 창안될 수 있도록. 그녀의 작품은 그렇게 허무의 덫을 놓아 관객의 시선을 몰락으로 유혹하고 있다. 부재를 세공하는 그녀의 작품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그와 같은 승화의 윤리학이다. 만일 예술이라는 환영적 세계에 기대할 수 있는 윤리적인 무엇이 존재한다면, 백가령의 작품이 보여주는 이미지의 실어증은 정확히 그와 같은 윤리적 실천으로서의 예술을, 일종의 하얀 거짓말인 그것의 기능을 숨기고 있다.

채움의 결핍, ‘아나크네(Arachne)의 빛’

홍경한 미술평론가

 

1. 작가들은 자신의 삶과 연계된 현실의 다양성을 의식한 상태에서 수사적 동일성을 찾기도 하지만 일상에서 쉽게 마주하는 의제들을 화면 속으로 끌어 들여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고, 고해의 틈 안에서 조형을 거듭한다. 가끔은 삶의 투영이 진실하게 이뤄지지 않은 채 미를 가장한 시각적 쾌락, 혹은 껍데기의 재현에 머물거나 편애된 가치 또는 유희에 불과한 매개로 남겨지는 것도 사실이지만 작가란 그렇게 강력한 리비도 아래 초자아와 갈등을 빚으며 ‘세상과의 반응’을 표현의 화두로 삼는다.

작가 백가령의 작품에서도 ‘세상과의 반응’을 본다. 정적이고 고요하여 역동성과는 거리를 둔 그 반응은 정지된 듯 순간적 지연에 몰입된 사물과 스냅처럼 멈춰서 있는 인물 등에서 적절히 드러난다. 유속 느린 그것의 정체는 지각하는 인간만이 깨달을 수 있는 대상에 대한 개념과 이성, 판단과 가치관을 함축한 ‘사유’이다. 내면의 성찰을 통한 삶의 단상들 혹은 존재론적 고찰, 그 자체인 셈이다. 작가는 이를 ‘아나크네(Arachne)의 빛’으로 명명한다.

‘아나크네의 빛’은 거미와 연관된다. 작가에 따르면 ‘아나크네’는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거미의 화신 이름을 변형한 단어다.(본래의 이름은 아라크네(Arachne)로, 신화 속 베 짜는 여인이었다. 직물의 수호신인 아테나 여신과 내기를 했는데, 신을 조롱하는 장면을 담아 아테나 여신의 분노를 산 끝에 영원히 베를 짜는 거미로 변한다) “작업실 앞 텃밭 속 작은 거미의 허공에서 닿으려고 버둥거리며 ​길을 놓으려는 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싶었다.”는 것이 ‘아라크네’가 ‘아나크네’로 소환된 배경이다.

그는 이 배경에 대해 “왜곡이든, 흔들림이든, 낯설음이든 남들이 주의 깊게 바라보지 않던 것을소재로 접근하는 자유로움, 오랜 시간의 거듭된 강박을 벗어버리고 표면, 이미지에서 오는 진(眞)의 허무를 고통의 쾌락으로 상정했다”고 말한다. 따라서 백가령의 2017년 전시 주제이기도 한 ‘아나크네의 빛’은 그의 발언처럼 “나름의 진(眞) 바라보기이며 공백(空白) 마주하기”이다.

‘진(眞) 바라보기’와 ‘공백(空白) 마주하기’에서의 ‘진(眞)’은 어느 곳으로든 진정성 있게 나아감이다. 주변에 아랑곳없이 자신이 추구하는 세계로의 무뚝뚝한 걸음이자 다양성이 인정되는 상황으로의 지향이다. ‘공백 마주하기’는 삶의 내외가 마주하는 공간이다. 공간은 함의의 넓이가 좀 있다. 현실일 수도 있고 작품일 수도 있다. 상상의 그 무엇이기도 하다. 다만 백가령에게 있어 ‘진(眞) 바라보기’와 ‘공백(空白) 마주하기’는 소재의 친근함과 익숙한 인식력 아래 펼쳐진다.

일례로 접시에 포크가 놓이고 가면을 착용한 여성이 어떤 알 수 없는 행위를 취한다. 피사체를 고의적으로 흩트려 놓거나 데칼코마니처럼 펼쳐놓고, 나비가 앉은 정적인 모습의 인물이 등장해 낯섦을 보다 생경하게 만든다. 몇 작품은 마치 바니타스 정물화(Vanitas‘ still life)를 연상케 하는 구도로 의도의 시각화를 시도한다. 일단의 작품은 마그리트의 풍경이 떠오르게 한다.

이 가운데 자연의 모든 것은 원과 원뿔, 원기둥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세잔의 주장을 인용한 듯한 도형과 해골이 자리한 사진을 보면 세상의 삶이란 일시적이고 부질없음을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엎어진 유리잔, 낡은 책, 깃털 펜, 연기가 피어오르는 촛불 심지 등은 묘사되어 있지 않으나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는 비교적 어렵지 않다.(그러나 상투적인 메멘토모리(Memento mori)를 언급하는 것 같진 않다) 하나같이 다소 우울한 분위기에 절망감, 허무의 여백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과 획일적이지 않다는 것이 특징이다. 하지만 그것이 곧 ‘백가령 식 사진’이기도 하다.

‘세상의 삶이 일시적이고 부질없음’을 나타내는 상징들은 참 됨(眞)을 이해하기 위한 비움(空)의 풍요로움으로 은유된다. 놓았을 때, 버렸을 때, 내려 놨을 때 진정한 넉넉함을 느낄 수 있다는 의미다. 다소 돌아가는 느낌은 주지만 때문에 그의 사진들은 장식적인 겉멋 보다 우선하는 사색의 기운이 크고, ‘찍는다’기 보단 ‘담는다’에 가까우며, 오묘한 형상들로 인한 정적인 기운은 그의 작품을 특정하게 하는 이유로 남는다.

하지만 장황한 설명을 밀어낸 자리에 들어선 고요한 여운이 그 자체로 모든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은 단점이다. 하나하나의 설정이 포괄적 양태로써의 존재성을 가리킨다는 점과, 철학적인 테두리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험으로 빚어진 작가 자신의 가치관과 정서가 ‘일차적’으로 전달되고 있음은 관심의 증폭을 희석시키는 이유다.

물론 그의 작업은 잘 보이지 않는 인간 내면의 귀퉁이에서 겨우 이름을 붙들고 매달린 동시대인들을 떠오르게 할뿐더러, 다분히 현실성을 띠다가도 또 다른 측면에선 상상의 촉매를 건드려야만 열람할 수 있는 여러 기호적 장치들이 긍정성을 덧대는 측면도 없진 않다. 허나 사진 한 장마다 부유하는 과거와 현재, 어제와 오늘, 멈춤과 지속 아래 생을 여미는 부질없는 치열함을 너무 쉽게 노출시키고 있다는 건 아쉬움이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표상과 속성의 문제에 개입되는 철학의 깊이이다. 즉, 표상은 언제나 철학적 사고를 배경으로 하고, 그 결정체는 유동적이며 정신적 현상으로 정의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할 때, 내적 유발을 통한 행위의 표면적 반응은 늘 시각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지만, 심도 있는 철학이 개입되어야 비로소 비존재이면서 무존재하는 날카로운 틈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백가령의 현재 작업에선 그 날카로운 틈을 발견하기 어렵다. 필자에게 보낸 것을 포함해 다양한 매체를 통해 무수히 많은 글과 이미지들을 쏟아 놓지만 아직 체계적인 언어로 고착된 것은 아님을 확인하게 된다.

 

3. 미학적으로 예술이란 유보의 관념이며 개념상 가감의 보류이다. 백가령의 사진은 그 중간 어딘가에 있다. 비록 “설명해주기 보다는 덩그러니 걸려있어도 도란도란 이야기를 건네는 이미지”로까진 갈 길이 멀지만 백가령이 생성하는 이미지들은 본래의 개체적 특성은 해체되고 작가에 의한 새로운 의미, 보는 사람에 의해 판독되고 완성되며 상상할 수 있는 텍스트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특히 그의 사진은 일상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방향을 내보인다. 이는 습관적인 일상성에 대한 예민한 시선의 결과이며 논리에 대한 역설, 그리고 일상성을 미의식으로 치환하려는 실증주의적 사고의 귀추라고 할 수 있다. 백가령은 그 실증주의적 사고의 귀추를 단지 ‘드러남’과는 다른 상징의 연속으로 구현하며 기표화 한다. 인간으로서 느끼는 보편적 공허와 생경함, 번잡스럽고 아옹다옹하며 살아가는 삶에 관한 내용들을 나름의 도식에 얹힘으로써 비루하고 전투적인 일상이 전혀 다른 세계로 거듭나게 유도한다. 여기에 그는 관자의 상상력과 자신의 경험이 맞물리게 하여 무제한의 예술적 자유를 끌어들이고, 기존의 실존적인 관념성과 버무려 의식의 자유로운 기술과 연상을 근거로 치유 가능한 세계를 기원하듯 펼쳐 놓는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그의 사진은 다분히 자의식에 근접한 작업이랄 수 있다.

더구나 작품 구석마다 숨어있는 비움으로써 채우고 채워짐으로써 비워내는 공진의 과정들은 자발적으로 건져 올린 내적인 이미지가 어떤 방식으로 공명의 수위를 지나 공(空)의 개념으로 나아가고 있는지를 어렴풋이 보여준다. 공(空)이란 본디 공명을 발판으로 한 의식의 실천이랄 수 있음을 뜻하고, 작가는 그것에 여러 현실적인, 혹은 시공의 잔상이 남긴 의미들을 덧씌우지만 그것이 형식을 통해 직관적인 지력위에서 활성화 되어있을 뿐 그 자체가 전부는 아니다. 그렇기에 백가령이 언급한 ‘공백의 풍요로움’이란 어떤 의미의 조립에 있어 채움의 결핍을 역으로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게 바람직하다.

1) 백가령의 작업은 예술자체와 작가 간 호환성에서 기록의 권역을 되찾고 이를 통해 내재된 자의식, 즉 고해성사와 같은 관념의 접속을 두려워하지 않은 채 스스로의 자아에 매스를 가하는 것이면서 외적으론 시공을 관통해온 삶의 편린과 현재성이 당대 부여된 보통사람들의 삶과 욕망, 고뇌 등이 복잡하게 오버랩 된 듯한 여운이 크다.

2) 참 됨을 향한 공의 여백은 작가의 평소 가치관을 상징하는 관념의 기호이자, 차후 나아갈 미의식의 방향성을 일러주는 조타임에 분명하다. 씨줄과 날줄처럼 얽히고설킨 여러 내외적 의미들을 포섭하는 실질적인 매개로써도 자리한다. 다만 작품형식에 있어 메이킹(making) 포토의 개념과 현장성과 연출성은 지루한 감이 없지 않다.

3) 예술의 중요성은 외적인 것, 드러나는 것 자체에 있지 않다. 그보단 본질적인 것, 자신에 관한 사유로서 지나간 삶에 대한 회고와 반성을 통해 삶의 공명에 보다 진정성 있게 다가가려는 시도에 있다.

4) 이런 현상은 방법적으로도 어느 정도 나타난다. 즉, 백가령은 당대의 상황들을 지연이라는 사진의 매체적 특성에 버무려 다변화를 시도하는 듯하며, 그러한 변화의 틀은 기본적으로 사진, 설치, 영상을 오가는 장르 간 해체와 자신의 정체성을 들여다보는 것에서 비롯되고 있다.

BIOGRAPHY

주요 개인전 Solo Exhibition

2016 북촌 가회학당, Gallery Giotta

단체전 Group Exhibition

2016 Flowing, 북카페 야나문

2015 Pencil of Nature, 김PD의 통의동 스토리

초대전

2016 Drawing 담다, 대림창고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