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WA Note

ARTWA Artist - 이갑철 02 

‘정신을 양분해서 쓰면 결국은 에너지도 나뉘게 된다. 결국 내 자신과 모두에게 사기를 치는 거나 별반 다를 게 없다. 그게 용납이 안 된다.’ _ 이갑철

지난번에는 사진의 예술적 가치를 사실성과 기록성에서 찾았던 1960년대까지 한국사진의 한 경향인 ‘리얼리즘 사진’의 등장 배경을 살펴 보았다. 이 시기의 한국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국토를 새롭게 재건해야 했고, 극빈 상태의 국민들이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박정희 정권 (1963년12월 17일 ~ 1979년10월 26일) 16년간은 이 부분을 빠르게 해결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기에 창의적인 영역의 모든 분야는 지원을 받지 못했으며 특히 교육, 문화, 예술 등은 암흑기라고 표현해도 될 만큼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시기 도시가 아닌 진주 출생인 이갑철은 당시 만물상을 운영하던 아버지 덕분으로 고가의 카메라와 사진재료를 구입할 수 있을 만큼 넉넉하고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다. 고등학교 때부터 각종 사진 콘테스트에서 곧잘 상을 타게 되니 대학을 사진과로 정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평탄하고 남들보다 유복한 생활을 하던 이갑철은 아버지의 사업이 기울면서 서울로 상경한다. 당시를 작가는 ‘집도 절도 없던 시절 이었다.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사진 작업이 벽에 부딪혔다는 절망감 때문에 더욱 힘들었던 시기’ 였다고 말한다. 

 

그가 군대를 제대한 이후 1980년대 한국은 군부독재에서 벗어나 민주화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 들었다. 남북 통일이나 언론 자유 등의 가치를 바탕으로 한 민주주의와 정의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자유로운 분위기였지만 한편으로는 가난했던 지난 과거를 청산하고자 미국식 천민자본주의가 강하게 뿌리내리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인 분위기 속에서 사진학과를 졸업한 학생들은 언론사 또는 방송국 취업을 선호하게 되는데 이갑철은 '사진으로 밥벌이할 생각은 전혀 안하고 오직 사진기로 일어서는 것만을 생각했던 시절이었다'고 말한다.

 

제일 먼저 이갑철을 세상에 알린 1984년 ‘거리의 양키들’ 연작은 이 시기에 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의 대표작인 ‘미국인들’(Les Américains)에 영감을 받아 로버트 프랭크의 사진을 우리 땅에서 한번 해보자 라는 생각으로 이태원을 찾으면서 시작되었다. 1986년 연달아 발표한 <도시 이미지>또한 이러한 맥락과 같다. 그는 이 시절의 사진을 ‘습작 시절’이라 말한다. 여행자처럼 자신만의 언어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이갑철은 천부적으로 카메라의 눈을 하나 더 가진 이 시대의 ‘관찰자’이다.

다음은 이갑철의 1985~1990년까지 작업한 ‘타인의 땅’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

Text by 최유진

 

*천민자본주의(Pariah Capitalism) :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독일어: M. Weber)가 처음으로 사용한 전근대 사회에 있었던 비합리적이고 비인간적인 폐쇄적 자본주의 또는 그 소비 및 생산 문화를 뜻한다. _자료: 위키피디아

아래 (사진, 글- 이갑철)

First Issue LIFE Magazine November 23, 1936

‘거리의 양키들’ 연작. 이태원, 서울. 1984. 멀리서 카우보이 모자를 쓴 무법자 풍의 한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서부극의 결투 장면을 연상한 나는, 원하는 사정거리 안에 그가 들어서자 잽싸게 방아쇠를 당겼다. 내가 사용한 카메라가 작아서 그리 폭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는지, 그는 싱긋 웃고 지나갔다.

‘거리의 양키들’ 연작. 동두천, 경기도, 1984. 주로 이태원에서 작업하다가 나중에서야 동두천을 드나들게 되었다. 활기차고 흥미로운 분위기를 지닌 이태원에 비해, 동두천은 삭막하고 을씨년스런 느낌이 강했고, 거리에 어둠이 내려야 비로소 활기를 띠곤 했다. 인화를 하고 나서야 사진 가운데의 두 남녀가 나를 매섭게 쏘아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미리 알았다면 찍을 엄두를 내지 못 했을 것이다.

‘거리의 양키들’ 연작. 동두천, 경기도, 1984.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미군 헌병들이 사복을 입은 한 흑인을 연행해 가고 있었다. 끌려가는 사람이 한국인이 아니라서 그랬는지, 어떤 이념이나 의식이 작동하지는 않았다. 색다른 장소나 상황에 대한 작가로서의 호기심, 사진적 순간성에 대한 관심이 더 컸다. 이때의 순간성은 기계적 형식적 순간성이 아니라 마음을 움직이는 어떤 정조(情調)를 동반하는 순간성이다.

‘도시의 이미지’ 연작. 종로, 서울. 1985. 종로2가 모퉁이 금강제화 앞 건널목 풍경이다. 찍기 전에 카메라 앞에 거울을 내밀어 뒤편 건물의 반영(反影)을 사진에 더했다. 반영을 이용한 이미지의 유희는 리 프리들랜더(Lee Friedlander)가 즐겨 구사하던 수법이다. 떠라 한다고 해도 나의 존재감은 있다.

‘도시의 이미지’ 연작. 명동, 서울. 1985. 사람의 얼굴만큼 많은 것을 설명해 주는 것도 없다. 대체로 그것은 사진의 모호함이나 긴장감을 앗아가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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