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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사마 야요이(Kusama Yayoi) - 자기소멸(Self Obliteration)

Text by 최유진

동시대미술 씬(scene)에서 가장 ‘핫’ 한 ‘일본 작가’를 꼽으라면 전방위 예술가인 쿠사마 야요이(Kusama Yayoi)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올해 86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열정적이면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선보이고 있는 족적마다 미술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행보를 잇고 있기 때문이다. 


1929년 일본 나가노 현 마츠모토 시의 한 보수적인 가정에서 태어난 쿠사마는 겉으로는 부유하고 평범했지만 아버지의 방탕한 생활과 집착 강한 어머니로 인해 무난하지 않은 환경에서 성장했다. 우리가 흔히 ‘땡땡이’라 부르는 점(dot: 점무늬) 또한 그 당시부터 시작되었는데, 그림 그리는 것을 반대하는 어머니로부터 가해지는 폭력에 의한 결과였다. 때문에 당시 쿠사마가 그린 엄마의 초상화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점들은 엄마를 물거품처럼 사라지게 하고 싶은 원망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불쾌한 관념이나 사고, 기억을 무의식 속에 가두려는 마음의 작용이 컸던 가정환경은 오히려 그 자신 내부에 감춰져 있던 예술성을 발견하는 단초가 된다. 10살 때 집 뒤 강에서 주은 작은 돌로 조각을 만들면서 미래의 예술가상을 스스로 스케치한 것을 계기로 유년의 아픈 기억들은 화가 나면 세상이 빨간 점으로 차오르는 모습으로 치환되었으며, 압박과 비례한 강박증은 되레 예술의 자양분으로 승화되기에 이른다. 비록 개인사적으론 지극히 불운했던 환경과 강박신경증의 병력은 작가로써의 삶을 트는 또 하나의 길이었던 셈이다. 따라서 오늘날 쿠사마 야요이를 상징하는 ‘그물망’이나 ‘점 무늬’와 같은 독특한 형상은 자서전적 의미를 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쿠사마 야요이는 1947년 18세 때 교토시립예술학교에 입학해 일본화를 공부했다. 얼마 전 작고한 우리나라의 천경자 화백이 일본화를 배우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몇 년 뒤의 일이다. 하지만 천경자와 달리 쿠사마 야요이는 일본화를 그리 오래 하진 않았다. 점점 추상미술에 빠져들었고, 1951년 마츠모토 창조미술전에 입선 하면서 본격적으로 예술계에 발을 들여놓는다. 


흥미로운 사실은 가정에서의 억압된 분위기, 그 중에서도 어머니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던 쿠사마가 보인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그녀는 평소 흠모해온 미국 여류화가인 조지아 오키프에게 뉴욕으로 가고 싶다는 편지를 보냈는데, 오키프의 초대로 인연이 되어 1957년 원자폭탄으로 폐허가 된 일본과 가족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오키프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이주할 당시 뉴욕을 비롯한 유럽에는 아시아 작가, 특히 여성작가는 성공할 수 없다는 불문율이 존재했다. 그도 그럴 것이 1970년대까지만 해도 서구예술계는 모두 남성 중심의 문화가 지배했고, 백인여성들조차 예술가로써 자리 잡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뉴욕은 정신병적인 환각에서 시작된 쿠사마 야요이의 독특한 예술에 관심을 보였다. 


뉴욕시절의 쿠사마는 엄청난 양의 작품을 그려 관심에 보답했다. 반복적으로 중첩된 물방울 이미지로 당시 화단에 큰 충격을 안겨준다. 이 작업을 진행하는 동안 매일 그물을 그리다 보니 벽이고 뭐고 모든 것이 물방울로 보이고 빨간 그물로 비춰져 여러 차례 심장발작을 일으켜 뉴욕 병원에 구급차로 실려 가는 등 고통스러운 나날이 이어지기도 했지만 끝없이 되풀이되는 점과 그물망의 의미를 몰랐던 뉴욕은 오히려 그림의 빼어난 에너지에 감흥을 느꼈고, 흉내 낼 수 없는 상상력에 감동을 받는다. 


정신병의 고통에서 분출된 환각을 무의식적으로 담아낸 그녀의 그림에서 신선함과 파격을 엿 본 뉴욕은 쿠사마 야요이를 성공적인 아시아 출신 작가로 소개하기에 이른다. 그렇다고 뉴욕에서의 성공이 작가 스스로를 억압하고 있는 모든 기제로부터의 해방은 아니었다. 어쩌면 성공은 결핍의 또 다른 모습이었고, 이는 그녀의 예술세계를 확장하는 원인이기도 했다. 


이에 쿠사마 야요이는 1960년대 초반 자신의 옷을 뜯어 중고 재봉틀로 수많은 남근상을 만들어 다시 한 번 미술계를 뒤흔들어 놓는다. 성적 억압을 상징하는 이 작업은 강박신경증에서 비롯된 점과 그물의 연장선상에서 예술로 자신을 치유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1968년 자기소멸 ‘self obliteration’이라는 제목의 영화로 고통과 욕구가 사라질 때까지 미친 듯 싸우다 느끼는 죽음 같은 휴식을 표현했다. 


1960년대 후반의 쿠사마 야요이는 보다 적극적이었다. 작업실에만 머무르지 않았고 회화, 조각을 넘어 해프닝으로까지 예술영역을 확장시킨다. 그 하나의 예가 길거리로 나가 정치적 이슈를 다룬 해프닝 ‘러브포에버’이다. 이 작품은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누드 행위예술로, 현재화된 사건을 “나는 자유와 판타지의 문을 찾는다. 당신은 생명을 걸고 모험의 댄스에 참가하라”는 구호 속으로 끌어들인 체험예술이었다. 쿠사마 야요이가 정치적 예술가로 분류되진 않으나 자유와 해방의 열정이 얼마나 뜨겁게 인류공통의 문제로까지 넓어졌는지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러브포에버’ 이후 쿠사마는 1966년 ‘오만(傲慢)’을 상징하는 은색 공을 2달러에 판매한 작품 ‘나르시스 가든’ 퍼포먼스를 베니스비엔날레에서 선보였고, 1969년 쿠사마 패션 엔터프라이즈를 설립해 직접 디자인한 의류를 전 미국 400여개의 샵에서 판매함으로써 예술과 산업의 경계 허물기에 도전한다. 하지만 뉴욕에서의 삶은 왕성한 창작 욕구를 해소하는 창구이면서 수많은 자살 시도를 했던 소외된 이중적 삶의 병행이었다. 예술성을 인정받을수록 심리적 외상은 점점 악화되었고, 전문적인 정신 치료는 더욱 절실했다. 때문에 그녀에게 예술은 그야말로 살기 위한 도피의 세계이자, 먹지도 자지도 않고 환각이 없어질 때까지 그림을 그려야 하는 치열하면서도 잔인한 일상의 다른 말이었다. 그리고 이 당시의 상황은 고스란히 집필 소설 『맨해튼 자살 미수 상습범』에 수록되었으며 20여권의 시집과 소설에서도 엿볼 수 있다.


쿠사마 야요이는 죽음으로 가득했던 16년간의 뉴욕 생활을 정리하고 1973년 일본으로 귀국한다. 그녀는 현재까지 42년간 도쿄 신주쿠 정신병원에서 살고 있고, 병원근처에 있는 ‘쿠사마 스튜디오’를 오가며 꾸준히 작업을 이어가며 급진적인 작품들로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그러던 중 그녀는 1990년대 ‘무라카미 류’ 감독의 영화 도쿄 데카당스에 미래를 예언하는 점술가로 출연 하면서 대중에게도 익숙하게 소개된다. 
1989년 미국 뉴욕은 대규모 회고전 <Love Forever: Yayoi Kusama, 1958-1968>을 ‘LA 주립 미술관’에서 개최해 쿠사마를 재조명하고,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 일본 작가로 선정되면서 국제적인 작가로 다시 한 번 급부상한다. 이후 쿠사마 야요이는 ‘뉴욕현대미술관’, ‘미네아폴리스 워커아트센터’, ‘도쿄 현대미술관’에서의 순회전시로 일본 동시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로 우뚝 선다. 특히 2004년 도쿄모리미술관에서의 전시 <KUSAMA TRIX>는 관객의 엄청난 호응을 이끌어 주목을 받았고, 2011년과 2012년에는 ‘레이나소피아국립미술관(마드리드)’, ‘퐁피두센터(파리’), ‘테이트모던(런던)’, ‘휘트니미술관(뉴욕)’ 등 세계 유수의 미술관을 순회하는 회고전을 통해 명실상부한 아티스트로써의 입지를 재확인한다. 그리고 이러한 행보는 전 일본을 순회하는 쿠사마 아방가르드 패션쇼 프로젝트를 통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86세의 쿠사마 야요이는 이제 정신적 휴식을 작품을 통해 선보인다. 자신의 정신병과 싸워온 쿠사마에게 예술은 죽음을 대신하는 선택이었지만 심각함을 벗고 스스로를 가둔 밀실 같은 어둡고 불안한 심리를 자연의 공간으로 대체해 사색과 체험으로 발전시켜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그리고 유년기부터 이어진 그녀의 강요된 삶과 모든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는 서구중심의 동시대미술 속에서 하나의 자존심으로, 아시아의 미술을 새롭게 개척한 선구자로써의 위치를 재상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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