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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WA Note

ARTWA Artist - 김명규 01

김명규 작가를 소개하기에 앞서, 그가 대학시절을 보낸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중반까지의 한국의 문화적 배경에 대해 먼저 살펴보려고 한다.

 

1988년 서울올림픽은 한국의 문화를 세계적으로 널리 알리는 동시에 다양한 문화행사를 통하여 국제적인 문화의 흐름을 국내에 소개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먼저, <세계현대미술제>은 당시의 기준으로 역대 최고의 예산인 90억 원이 투입되었으며, 송파구 방이동에 위치한 50만평의 부지에 공원을 조성하여 다양한 행사와 조각 전시가 진행되었다. <세계야외조각 展>, <국제야외조각심포지움>, 그리고 국내외 회화를 소개하는 <국제현대회화 展>, <국제현대서예 展> 등이 주된 행사였다. 이에 병행하여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된 <한국현대미술전>에는 한국화단의 원로·중견작가의 작품 500여 점이 전시되어 한국미술의 양상을 해외에 소개하였다.

<세계현대미술제>에 초대된 해외 미술계 인사들에게 한국 미술은 깊은 인상을 남겼고, 1989년 해외여행 전면 자유화 조치로 인해 본격적으로 한국미술은 해외진출을 하게 된다. 대표적으로 1992년, 단색화 계열의 작가들이 리버풀 테이트갤러리(Tate Gallery Liverpool)에서 성공리에 전시회를 개최했고, 같은 해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카셀 도큐멘타(Kassel documenta)에 참여한 육근병의 설치작업이 소개되어 세계 미술계의 관심을 모았다.

1992년, 비디오 아티스트 故백남준의 <비디오 때, 비디오 땅展>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되어 그 동안 부분적으로만 알려졌던 그의 작품세계가 본격적으로 국내에 소개되었다. 그 이듬해인 1993년, 세계 3대 비엔날레로 손꼽히는 휘트니 비엔날레(Whitney Biennial)가 한국에서 개최되었다. 이는 휘트니 비엔날레 최초로 국경을 넘어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개최된 것으로 큰 의미가 있다.

‘1993 휘트니 비엔날레’는 당대 국제 미술계의 최신 경향을 대변했고 “인종적, 민족적, 젠더 상의 다문화주의적 접근방식을 적극적으로 실험한” 대표적인 전시였다. 또한 그 내용에 있어서도 설치미술과 비디오 작품의 수를 대폭 늘림으로써 회화 중심의 전시 패러다임에서 벗어났고, 작가들도 미국 내의 유색인종, 여성작가, 동성애자 등 사회적 소수자들을 대거 포함시켰다. 15만 명이 참관한 이 행사는 우물 안 개구리 같던 한국 미술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비엔날레’라는 용어가 일반인에게 알려졌고, 1995년 아시아 최대 미술 축제인 ‘광주 비엔날레’가 생기는 등 한국 미술 발전에 커다란 기폭제가 되었다.

 

이렇듯 88년~95년에 집중적으로 한국 미술이 해외에 소개되고, 국제적인 미술의 흐름을 국내에서 직접적으로 접할 수 있게 되면서, 한국 미술계도 자연스럽게 변화 되었다. 수 많은 작가들이 다원적이고 다문화적인 미술 경향에 자극을 받고 해외로 진출 및 유학을 떠나게 된 시기이기도 하다. 또한 한국 미술계 내부에서도 이전의 회화 주류의 성향에서 벗어나 비디오, 신체미술, 사진, 설치 등 다양한 매체로 작업하는 작가들이 많아졌다.

 

김명규 작가는 이러한 한국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20대를 보냈다. 동양화를 전공한 작가는 서양미술의 표현 양식과 그들의 예술적 감성을 직접적으로 경험하기 위하여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그렇게 유럽의 동시대 미술을 10여년간 경험하게 되었다.

​Text by 김은지

김명규, <Portrait of Ciro> 1998년 作

김명규, <Untitled> 1999년 作

김명규, <Correspondant> 2000년 作

김명규, <Visible> 1988년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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