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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WA CRITIQUE] 서유진 - 현실을 밑동으로 한 자문

현실을 밑동으로 한 자문 : 예술과 태도, 관계, 형식에 관한 인식 비평은 작품의 소리 없는 말을 건져내는 행위다. 그만큼 소통불편의 대상에게 말을 걸어야 하는 거북함, 형상만으로 독해한다는 건 생각보다 까다로운 일이다. 특히 오랜 경험으로 독자적인 스타일이 완성되지 않은 경우엔 작품에 대한 해석은 고사하고 정리하는 데만도 상당한 시간과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그런 점에선 한창 무언가를 실험할 단계인 서유진의 작업도 마찬가지다. 범주가 넓고 작품 간 요철이 강한데다, 아직 자신만의 양식이 확립되지 않은 탓에 의도와 표상의 비원활함, 계획적인 것과 비의도적인 마찰이 불친절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일관성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온전한 정돈은 아니어도 일정한 나름의 맥락이 엿보임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 중 하나는 삶의 리얼리티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2010년 초반 이후 서유진의 작업 전반을 고려하면)서유진의 작업에는 예술과 예술가의 삶, 동시대를 살아가는 한 인간으로써의 사회에 대한 자문에서부터 익명의 존재에 관한-우연성1)을 동반한-서사까지 담겨 있다. 때론 결박되지 않는 스스로의 감정도 곧잘 투사된다.(그것은 어쩌면 니힐리즘nihilism2)적 요소가 다분하다) 그리고 그의 리얼리티는 작가 스스로의 경험, 그리고 (작가의 발언을 참고할 경우) ‘관계와 물질에 관한 끊임없는 집착’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이 가운데 필자가 주목한 건 ‘끊임없다’는 형용사다. 왜냐하면 이 잇거나 단절의 반복과 지속이 서유진 작업의 배경, 즉 폭 넓고 변주 강한 작가 작품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서유진의 작품들은 방식 면에선 혼잡스럽고 복잡한 양상을 지닌다. 판화, 퍼포먼스, 영상, 설치에 이르기까지 분야도 규정적이지 않다. 그럼에도 어떤 흐름은 읽힌다. 그건 세상에 대한 ‘반응’이다.3) 경험의 이미지이다.4) 경계 없는 표현방식이 즉각의 해석을 가로막지만 서유진 화법의 첫 문장은 ‘나로부터의 세상 보기’인 셈이다. 이에 대해 작가는 “나에 대한 인정이자 솔직함이라고 생각한다. 작업은 현실에 대한 비판의 목적도 있지만 완전히 반대로 타협, 포기, 허무를 이야기 하려 하는 것이다.”고 자신의 작가노트에 적고 있다. 불완전하고 온전한 부합은 아니나 이는 추상적이고 내적인 동요의 현현으로써의 예술, 과정과 조형의 혼합체이다. 옛 작품은 물론, 서유진의 작업 가운데 내적인 동요의 현현으로써의 예술은 근작에서도 드러난다. 일례로 2017년도 작품 <정화(catharsis)>는 금속 좌대 위에 비닐을 덮고 수생식물 등을 올려놓은 설치작업이다. 구멍 뚫린 스프레이 캔이 거꾸로 박힌 채 흠집이 난 비닐을 떠받치고 있는 구조인데, 캔 하단 오목한 부분에 수생식물을 올려놓았다.(이 수생식물은 어딘가 힘없이 연약해 보인다) 작가는 이 작품에 대해 “사회에서 바라는 예술가의 역할과 예술가들끼리 서로의 태도를 규정짓는 현상을 나름의 언어로 충실이 행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작업.”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가시적 조형만으로는 언뜻 이해가 쉽지 않다. 필자에겐 오히려 예술가의 역할과 예술가들 간 태도보단 공생과 조율의 시스템 문제로 다가온다. 아무도 관심 두지 않는 작은 틈(캔 바닥)에서 가냘프게 존재(수생식물)하는 것과 그것에 대입된 작가 자신(행위자)이 핵심으로 읽히는 탓이다.5) <정화(catharsis)>가 진지한 인상을 심어준다면 작품 <분해하기 올려놓기>(2017)와 <For Show 올려놓기>(2017)는 꽤나 재미있다. 하나의 놀이처럼 비춰진다.6) 이 중 우레탄 폼과 철제 구조물, 단채널 영상이 혼재된 <분해하기 올려놓기>는 구조 속 존재성과 모순의 상황을 열람케 한다. 일정한 프레임 내 발포된 우레탄폼은 그 덩치가 무안할 만큼 왜소한 여운을 띤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작가는 이 우레탄폼을 가뒀던 프레임을 좌대로 활용한다. 이때 우레탄폼은 독자적 작품으로 재탄생하고, 그것을 받치는 프레임은 이제 충분히 종속된 역할로 위치변경 된다. <분해하기 올려놓기>는 아이러니를 갖추었지만 관계의 모순은 사실상 대단히 현실적이다. 공동체와 개인, 나와 우리라는 관계 내에서 꿈틀거리며 위치변화를 도모하는 우리네 사회 구조와 닮았기 때문이다.7) <분해하기 올려놓기>와 재료 면에서 동일한 <For Show 올려놓기>는 작품을 선보이는 과정을 담은 키트에 가깝다. 이 작품은 조립식 좌대를 만들어 가방에 넣은 후 우레탄폼을 발포해 채운 후 이를 다시 풀어 좌대 위에 전시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작품이 작가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과 보여지는 것, 그리고 그것을 마주하는 관객들 간 관계의 순환을 재치 있게 담아내고 있다는 게 특징이다.8) 가벼운 듯 현실의 무게를 드러낸 작품 중에는 <정리하기 나가기>(2018)도 있다. <정리하기 나가기>는 작가가 10개월간 머문 작업공간을 떠나며 느낀 감정과 상황을 담은 작업이다. 일정한 기간, 일정한 공간에서 예술이란 것을 했지만 막상 거처를 옮길 때마다 남는 것은 ‘예술’이 아닌 ‘짐’이라는 사실을 비틀었다. 작가는 이 비대한 짐이 된 ‘예술’을 하나로 뭉쳐 밖으로 나가려는 장면(그러나 결코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을 퍼포먼스영상과 설치로 다뤘다. 이 작품을 통해 작가가 놓인 현실에 대한 좌절과 허무 등을 포함한 예술의 가치에 대해 되짚고 있다. 다시 말해 자신이 하는 일이 무용한 것은 아닌지, 자칫 쓰레기를 만드는 듯한 느낌까지 갖게 하는 직업을 왜 이토록 아등바등 이어가고 있는지 질문하는 작품이라는 것이다. 작가의 예술에 관한 혹은 예술과 삶에 관한 스스로의 자문은 설치, 영상, 사진 등, 다양한 접근법으로 제작한 <조명하다>(2015-)라는 제목을 통해서도 폭넓게 전개된다. 우선 이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의 설명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작가는 자신의 작가노트에 “전시에 있어서 조명이란 장치가 작품을 어떻게 인식 시키는 가를 결정짓는데, 그저 대상을 보이게 하는 기능뿐이 아닌, 스스로가 능동적인 태도로 작품 인식에 영향을 준다. 나는 직업적 특성에 따른 열정과 현실적 상황, 그리고 개인이 처한 환경에 대한 분노를 이야기 하고자 한다. 대상을 비추는 조명의입장과 의미는 대상에 따라 다르지만, 결국 관객이 작품을 인식하는 과정에 개입하는 태도는 같다.”고 적었다. 작가의 서술은 예술가들의 오늘을 반영한다. 물론 비단 서유진 작가만의 상황은 아니다. 『예술의 음모: 보드리야르의 현대예술론』을 쓴 보드리야르의 지적처럼 많은 작가들이 보잘 것 없고 무의미한 일(어찌됐든 직간접적으로 관계 맺는 관객은 별 관심 없는 일을)에 열정까지 쏟아 부으며 가치의 법칙 없는 시대에서 불확실성과 미적 가치판단의 불가능성을 느끼면서 예술존재의 유구함을 믿는다. 서유진의 <조명하다> 연작은 그런 면에서 맥을 같이 한다.9) 비록 작가가 말한 분노는 쉽게 체감되지 않고, 인식의 과정은 다소 인위적인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지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지는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서유진의 작업은 조금 더 구체적인 리얼리티를 띤다. 예를 들면 아무리 노력해도 별로 나아지지 않는 삶을 다루거나(조명 받으면서 일을 하는 사람들, 백강우, 쏭, moa montage, 초딩마음10)), 화병의 꽃을 비춘 네 개의 조명으로 서서히 메말라 죽어가는 모습을 우리네 삶으로 치환한 <조명하다: 번화> 등이 그렇다. 작가에 의하면 우리 사회는 ‘물을 갈지 않는 화병 같은 곳’이다. 또한 ‘애초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땅은커녕 흙이 있는 화분도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반복적이고 당연하게 된 현상’이다. 너와 나 경계 없이 적용되는 슬픈 현상, 어쩌면 그 삶자체가 코메디아 델라르테Commedia dell'arte라는 점은 애석하지만 그릇된 주장은 아니다.

<조명하다>를 잇는 근작으로는 <illuminate>(2018)이 있다. 단어 그대로 무언가를 비추고 밝힌 작업으로, 지난 3월 개인전 주제인 ‘우리는 서로의 안중이 안중에도 없다’에 선보였다. 중형 크기의 회화와 영상, 조명 등으로 전시 공간 한쪽을 가득 채운 이 설치작업은 <조명하다>의 새로운 버전으로 스스로가 표상한 것의, 사물과 관계되는 방식 혹은 사물의 본질적인 존재방식에 관한 다층적 전사를 요체로 한다. 지난 6년여의 시간을 집대성한 듯 총체적 형식을 모두 거론한 이 작품은 기본적으로 <조명하다: 변화>의 결을 따른다. 물병 속에 담겨있는 감지기가 수면에 따라 조명장치를 제어하고, 시간 누적에 의해 에너지를 잃고 희미해진다. 흐릿한 환경에서 작품을 관람한다는 건 불가능하지만 그럴수록 관객들은 보다 세심하게, 면밀하게 들여다본다. 어느 부분에선 ‘우리는 서로 안중에도 없다’를 역설적으로 풀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무엇보다 삶을 지탱해온 사회와 제도 혹은 환경에 관한 비판적 시선과 관객으로 상징되는 이들과의 관계성의 문제, 제도와 존재 간 개인적 허무가 함축되어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눈에 띈다. 개인사와 작가가 바라보는 세상에 대한 예술과 관계된 것들이 표상의 이미지로 소환된다.11) 구체적 공간에서 대중 또는 관객과의 관계를 거론하거나 ‘나’를 중심으로 한 존재에 대한 질문, 허무한 사회와 예술 구조의 문제를 다룬 서유진의 작품들은 어느 한편에선 적극적인 소통을 시도하기도 한다. 단지 작품을 만들어 전시하는 정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다가서기와 유도하기를 통해 의도의 능동성을 보여준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아트포럼리 개인전 ‘우리는 서로의 안중이 안중에도 없다’에서 행해진 판화프로젝트 <Instant Image>(2018)이다. 이 프로젝트는 전시장에서 직접 판화를 제작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자유롭게 가져가도록 한 관객 참여형 작업이다.12) 관객이 언제 어느 때 방문하느냐에 따라 저마다 다른 판화의 순간이미지와 마주할 수 있다. 이 프로젝트는 ‘우연’과 ‘순간’이 지배한다. 아니, (다소 일차적 접근이긴 해도)엄밀히 말해 우연과 순간까지 작품형식의 일부로 수용한 기획이랄 수 있다. 여기서 우연은 작은 관계의 역사를 생성하고, 예술은 기획에 맞춰 기꺼이 소비된다. 서유진은 이를 판화로 기호화 된 작업을 통해 예술이든 사람이든 휘발되거나 의미될 수 있음을 고지한다. 사실 <Instant Image>는 유토피아와 예상 사이의 예술, 예술가 스스로에겐 유가치할 수 있는 예술행위가 어떤 위치에서 어떻게 소모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예술가가 작품을 제작하는 비밀스러운 과정을 전시와 함께 묶음으로써 관객의 구체적 참여를 담보하고 관객의 우연적 선택에 의해 기존 시스템을 배경으로 한 예술의 가치란 무엇인지 되묻는다. 필자는 이를 ‘주사위 작업’13)으로 본다. 우연성과 순간성, 존재확인이 불가능한 존재성을 말한 작업은 <Instant Image>이전에도 있었다. 2016년 성수동 일대에서 펼친 작업 <성수: 남다 판화 프로젝트>와, 2013년의 <플라타너스: 판화 프로젝트> 등이 그것이다. 먼저 <성수: 남다 판화 프로젝트>는 흔적의 기록에 의지한다. 판화로 복제된 이미지를 성수동 거리 곳곳에 붙여 방치하여 훼손되거나 없어진 것을 기록한 이 작업은 공간, 거주, 존재, 이탈, 흔적 등의 명사들이 연상된다. 사라지는 것과 존재하는 것, 그 사이의 작가적 개입을 전제할 때, 굳이 연결 짓자면 <정리하다>의 야외버전에 가깝다.

<플라타너스: 판화 프로젝트>는 대상의 상처를 덮어주는 행위로써, 치유를 바라는 작업이다. 그 대상이 나무(플라타너스)이지만 실은 자신의 상처 역시 작지 않음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나무든 공동체 구성원이든 우린 서로 상처를 주고받으며, 개중엔 씻지 못할 것도 있는 탓이다. 작가는 이를 “망원동 플라타너스의 상처를 판화로 복제하여 시각적인 고통을 공유하고 위로받고자 했다.”고 말한다. 서유진의 작품들은 이처럼 스스로 경험한 실제성을 바탕으로 미술을 시작한 이후 고군분투한 자신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작가 자신의 삶의 증거물로써의 예술세계를 만들어 왔다. 오늘날의 작품은 그 작은 내레이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며, 주어진 혹은 설정한 공간 속에서 본래의 존재의미가 전복되고 환기될 수 있음을 그 시간 내 간섭과 공간의 종횡을 통해 선보인다. 가끔은 <성수: 남다 판화 프로젝트>와 <플라타너스: 판화 프로젝트>, <Instant Image>처럼 작가에 의해 ‘행위를 짊어진 시간’이 동시에 구현되면서 현실적 인식가치를 재고되기도 한다. 그러나 서유진의 작업은 아직까진 보편적 인간가치회복과 인류공통의 건강한 미래를 위한 어떤 가능성으로써의 예술과 지극히 나의 이야기가 화두인 상태의 중간 어디쯤 위치한다. 살짝 눈을 돌리면 나를 중심으로 한 우리의 서술이 강하고, 한편으론 동시대 젊은 작가로써의 입장이 엿보인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분동의 무게는 아직 편애되지 않고 있다. 당연한 현상이지만 이것이 곧 나침반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 무게의 편애가 어떠하냐에 따라 그의 예술적 소실점도 달라진다는 점이다. 어떤 반응에 대한 단순한 도상의 나열이나 각주가 아니라 의미론적, 인문학적 토대로 한 깊이의 시선에 익숙해야 하고,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테두리 내에서의 동세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야 한다. ■

글 | 홍경한 미술평론가 작품 | 서유진

 

<주석> 1) 작가의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우연적인 것에서 필연적인 것을 찾아내고, 때론 우연성 그 자체로 남는다. 2) 니힐리즘은 단순히 하나의 상태일 뿐만 아니라 또한 과정으로서 부정(否定)의 힘이 증대함에 따라 정신의 쇠퇴와 후퇴로서의 수동적 니힐리즘과는 다른 형태를 갖는다. 일체의 기성가치에 대한 비판과 보이지 않는 벽에 관한 내러티브로 나타난다. 3) 작가 자신으로부터의 시작이겠으나, 특히 미술인으로써의 삶을 반영한 작품이 많다. 4) 이미지는 자연과 사물, 정신과 지각체험을 함의한 인간세계에 대한 해석이다. 본래 이미지란 인간 열망의 유무형적 표식이고 간절함의 증표이며, 세상과 반응하는 글이자 그림이고 언어이다. 세계 속 삶, 정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심적 이미지나 유형의 이미지도 존재하지 않는다. 5) 작가의 의도와 관객 수용에 이런 괴리가 발생하는 건 개방적 성격을 지닌 작품 자체에 기인하지만, 개념과 표상의 호흡이 원만하지 않은 이유도 있다. 6) <답례품>(2014), <방명제>(2014), LUCKY BOX(2014), successful showing(2014) 등의 작품도 가볍지만 재미있다는 여운은 전달한다. 7) 작가는 이 작품에 대해 “본인이 마주하는 현실과 거기서 비롯된 저항의 모습과 이후의 흘러갈 상황들을 예측함과 동시에 기대하고 있음을 보여주려 한다.”고 말하지만 설득력이 약하다. 의도와 표상의 괴리이다. 하지만 단단한 껍질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인간 삶에서 완전한 관계란 없다는 메시지는 확실히 전달된다. 8) 이 작품의 경우는 작가의 설명을 참조하는 것이 이해에 도움이 된다. 서유진은 필자에게 보낸 자료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전시 설치에 필요한 장치와 물건들을 바퀴 달린 가방에 담는다. 가방의 틈을 메우는 조형물을 만들고 하나의 짐으로 꾸려 전시장까지 이동을 하며 영상으로 기록한다. 전시하기 위해 상황과 조건에 맞춰 작품이 제작되고 간편하게 이동되는 과정을 보여주고자 한다. 오늘날 다양하게 마주하는 제약에서 현실 맞춤형 작품의 모습은 마치 부 산물 혹은 부속물의 형상으로 보이며, 충전물로써의 실질적인 기능과 예술작품으로써의 위치를 상기시키려 한다.” 9) 이 작업은 서유진이 2013년 선보인 <생계를 위한 P2-2 : 의자 만들어 팔기>(2013)나, <생계를 위한 P2-1 : 방문 미술 전단지 붙이기>, 그리고 이 둘을 조합한 2013년 작품 <케이크 뒤집기>와 유사한 접근방식을 지닌다. <생계를 위한 P2-2 : 의자 만들어 팔기>는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고 팔리지도 않으며 짐만 되는 작품은 왜 만들어야 하고, 어째서 예술 하는 사람들만 소중하게 여기는가에 대한 의문이 배어 있다. 이와 관련한 작가의 설명이 하도 솔직해 그대로 옮긴다. “우리 그림 그린다는 사람들은 필요에 의해 혹은 의무에 의해 예술품을 계속 생산해낸다. 하지만, 팔리지 않아 보관하기도 어려운 작품들은 전혀 생산성이 없고 그저 작가만 애지중지. ‘언젠간 팔리겠지 언젠간 전시해서 세상 구경을 할 수 있겠지’라는 마음으로 언제까지 자리만 차지하고 있을 작정인가. 쾌쾌한 창고 안에도 예술은 존재하는가? 아우라가 존재 하는가? 보관된 그림이 아닌, 방치된 헌 캔버스이다. 창고에 박아두느니, 재활용을 하고 실용적인 가구를 만들어 실생활에서 사용한다. 사용이 될 때 비로소 예술품이란 허망한 사물보단 실용적으로 된다.” <생계를 위한 P2-2 : 의자 만들어 팔기> 이전 작업으론 <생계를 위한 P2-1 : 방문 미술 전단지 붙이기>(2013)가 있다. 이 작품은 예술을 해야 하기에, 예술을 하려 다른 일을 찾아야 하는 예술가들의 상황을 작품으로 구현한 작업이다. 여기서도 작가 특유의 솔직함이 묻어난다. “아동미술 학원 강사 시급 6,000원~8,000원. 하루 꼬박 주5일 일해 봤자 얼마 주어지지 않는 급여로는 재료비, 작업실 월세, 생활비를 감당할 수 없다. 그나마 근무시간에 비해 더 받을 수 있는 일은 방문 미술. 방문 미술 고객을 모으기 위해 전단지를 붙인다. ‘갤러리’라는 특정한 공간의 기능을 이용해 나의 방문 미술은 메리트 있게 보인다. 관계자의 압박에 다시 뜯기고, 다시 붙이고를 반복. 언제 뜯길까 불안함. 누가 보기도 전에 뜯길까봐. 초조함. 한 장에 33원. 그것도 내 피 같은 돈인데. 난 점점 궁상맞아진다.” 10) 이 작업에 등장하는 이들은 연령대가 높지 않다. 아마도 젊은 작가이다 보니 비슷한 세대의 삶에 공감하는 듯하다. 물론 실제의 그들에게도 우리 사회의 무게는 엄중하다. 이에 대해 서유진은 자신의 작가노트에 다음과 같이 썼다. “이들에게는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보이는 모습과 우리가 노력해도 보기 힘든 ‘그들의 뒷모습’ 이 있다. 대상을 이해하고 내면의 모습을 인식한다는 태도는 매우 어렵고 무모한 것이며, 소극적인 시선은 그저 눈에 스쳐 지나가는 모습만 진실이고 모든 것이라고 믿는다.” 11) 결국 이 작업은 세계란 의식에 의존하지 않을 수 있으나 이미지는 의식에 존재한다는 것을 나타내며. 시각예술에서의 이미지는 상징과 기호이지만 기호는 그 자체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의미를 드러내는 무엇임을 우회적으로 증명한다. 12) 서유진은 과거 <성수: 남다 판화 프로젝트> 등을 통해 예술의 가치에 대해 질문한 적이 있다. 당시 그는 에디션이 없는 판화를 불특정 다수의 공간에 설치함으로써 예술의 장소성, 희소성, 원본성을 되묻고 예술자체에 대한 관객과의 관계를 질문했다. 2016년 선보인 <처음의 머리카락>도 관객 참여형 작업으로 꼽힌다. 제목처럼 머리카락을 소재로 한 이 작업은 눈을 가린 참여자들의 신체와 작품이 자연스럽게 맞닿으면서 예술의 직접체험을 가능하게 했다. 예술과 관객이라는 관계성을 거론하고 있다는 점에서 판화프로젝트의 초기형태라 해도 무리는 없다. 13) 이 표현은 존 케이지의 실험곡에서 따왔다. 그의 4분 33초처럼 예술가의 의도가 배제된 채 우연성에 의해 만들어지는 작품을 주사위 음악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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