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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WA PICK] Künstler 16 - 이갑철

사진은 현재 시각적 정보전달 매체로서의 독보적인 위치를 확고히 하고 있다. 한때는 서구 문명을 상징하는 문화 아이콘이기도 했던 사진은 한국에서 일제강점기, 해방, 6.25동란의 영향으로 다양한 사진의 양상으로 전개된다.


사진은 그 발명 이후부터 예술성과 기록성이라는 두 가지 지향점을 두고서 매체를 변화시키고 발전해 왔다. 당시 화가들은 사진을 참조하고 회화의 사실적인 묘사에 도움을 주는 정도로 삼아왔지만 사진가들은 회화를 극복해야 하는 대상으로 생각했다. 이후 다다와 초현실주의자들에 의해서 사진 이미지를 변형하는 시도는 평면예술로서의 가능성을 증명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이 갖는 사실성과 기록성이라는 장점은 정보전달 매체로서의 효과를 부각시켰다. 따라서 사진가들은 사진이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특성인 사실성과 기록성을 상징하는 작업을 하거나 사진의 이러한 요소들을 최대한 벗어남으로써 비구상의 세계를 표출하려 했다.


한국에서는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사진이 무엇인지도 모르던 1932년, 미국 뉴욕현대미술관 MoMA 에서는 사진을 미술과 동등한 위치에 둔 운영 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1940년에는 사진역사가인 버몬트 뉴홀 Beaumont Newhall 초대 큐레이터를 시작으로 독립적인 사진 부문을 설립했다. 이렇게 MoMA 는 사진 예술 분야에서 중심축을 만들었으며 사진의 예술적인 지위 향상에 큰 공적을 쌓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사진을 새로운 예술적 장르로 자리 잡기위한 위대한 예술가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시기에 한국은 일제 강점기였고 누구나 카메라를 소유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특히 사진은 사실을 기록하고 현실을 비추는 수단이기 때문에 조선을 통제하는 일제에 의해 사진을 찍는 행위 자체가 제약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1940년 전반기까지 제작한 사진은 대부분 남겨져 있지 않다.


1945년 해방 이후는 암울한 시기를 거친 대부분의 예술가들과 지식인들이 새로운 활동을 할 수 있는 격동기였다. 일제강점기에 유행한 ‘살롱사진’ 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식인 ‘리얼리즘 사진’ 을 추구하게 된 것은 한국 사진사의 전개 과정에서 볼 때 무척 중요한 시기이다. 또한 미국에서 고가의 카메라와 사진 재료를 구입 할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빠르게 퍼져나갔다.


1950년 이후 한국 전쟁은 사진가들에게 사진 활동의 기회를 제공했다. 군부대와 신문사에 고용되어 전쟁의 현장을 기록하고 개인적인 사진 작업을 위해 - 사진재료와 이동수단 또는 특별한 장소를 출입할 수 있는 허가증 발급 등의 이유 - 종군하는 사진가들도 있었다. 살롱사진 작가들은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생생한 역사적인 현장과 처절한 생활상을 통해 현실을 직시하게 되면서 ‘리얼리즘 사진’ 을 추구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에서도 리얼리즘 사진이 유행했었고, 미국에서 발간한 라이프 Life 잡지에서 선보인 포토저널리즘 Photojournalism 의 영향으로 1960년대까지 한국 사진의 한 경향으로 자리 잡았다.




“사진은 세상을 드러내 보여주는 객관적인 수단이기 때문에

기계시대의 소통에서 가장 중요한 매체이며

아직은 다루기 어렵지만 놀랍도록 강력한 새로운 언어임에 틀림없다”

헨리 루스



First Issue LIFE Magazine November 23, 1936

한국전쟁

출처: Life_평양 상공에 미국 비행기에 의해 공습을 받은 여파로 폭파된 집의 파편 / 1950.10.30




이 시기 한국 사진가들은 사회적인 관심을 표출하거나 인간의 삶과 폐허가 된 환경만이 가장 극적이고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주제라고 생각했다. 어찌 보면 의식적으로 자연이나 예술사진을 거부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서 사진의 예술적 가치를 사실성과 기록성에서 찾았다고 할 수 있다. 이갑철 작가는 바로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사진을 접하게 된다.




'정신을 양분해서 쓰면 결국은 에너지도 나뉘게 된다.

결국 내 자신과 모두에게 사기를 치는 거나 별반 다를 게 없다. 그게 용납이 안 된다.’

이갑철



지금까지 사진의 예술적 가치를 사실성과 기록성에서 찾았던 한국사진의 한 경향인 ‘리얼리즘 사진’의 등장 배경을 살펴보았다. 이 시기의 한국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국토를 새롭게 재건해야 했고, 극빈 상태의 국민들이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박정희 군부독재정치 (1963년12월 17일 ~ 1979년10월 26일) 는 16년간 이 부분을 빠르게 해결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기에 창의적인 영역의 모든 분야는 지원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특히 교육, 문화, 예술 등은 암흑기라고 표현해도 될 만큼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시기 도시가 아닌 진주 출생이었던 이갑철은 당시 만물상을 운영하던 아버지 덕분으로 고가의 카메라와 사진재료를 구입할 수 있을 만큼 넉넉하고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다. 고등학교 때부터 각종 사진 콘테스트에서 곧잘 상을 타게 되니 대학을 사진과로 정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남들보다 유복한 평탄한 생활을 하던 이갑철은 아버지의 사업이 기울면서 서울로 상경한다. 당시를 작가는 ‘집도 절도 없던 시절 이었다.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사진 작업이 벽에 부딪혔다는 절망감 때문에 더욱 힘들었던 시기’ 이었다고 말한다.


그가 군대를 제대한 이후 1980년대 한국은 군부독재에서 벗어나 민주화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남북통일이나 언론 자유 등의 가치를 바탕으로 한 민주주의와 정의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자유로운 분위기였지만 한편으로는 가난했던 지난 과거를 청산하고자 미국식 천민자본주의가 강하게 뿌리내리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인 분위기 속에서 사진학과를 졸업한 학생들은 언론사 또는 방송국 취업을 선호하게 되는데 이갑철은 사진으로 밥벌이 할 생각은 전혀 안하고 오직 사진기로 일어서는 것만을 생각했던 시절이었다고 말한다.


제일 먼저 이갑철을 세상에 알린 1984년 ‘거리의 양키들’ 연작은 이 시기에 로버트 프랭크 Robert Frank 의 대표작인 ‘미국인들 Les Américains' 에 영감을 받아 로버트 프랭크의 사진을 우리 땅에서 한번 해보자 라는 생각으로 출발했다.

1986년 연달아 발표한 '도시 이미지' 또한 이러한 맥락과 같다. 그는 이 시절의 사진을 ‘습작 시절’ 이라 말한다. 여행자처럼 자신만의 언어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이갑철은 천부적으로 카메라의 눈을 하나 더 가진 이 시대의 ‘목격자’이다.



거리의 양키들, 이태원, 서울. 1984

.

'멀리서 카우보이 모자를 쓴 무법자 풍의 한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서부극의 결투 장면을 연상한 나는,

원하는 사정거리 안에 그가 들어서자 잽싸게 방아쇠를 당겼다.

내가 사용한 카메라가 작아서 그리 폭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는지, 그는 싱긋 웃고 지나갔다.' 이갑철


거리의 양키들, 동두천, 경기도, 1984

'주로 이태원에서 작업하다가 나중에서야 동두천을 드나들게 되었다.

활기차고 흥미로운 분위기를 지닌 이태원에 비해, 동두천은 삭막하고 을씨년스런 느낌이

강했고, 거리에 어둠이 내려야 비로소 활기를 띠곤 했다.

인화를 하고 나서야 사진 가운데의 두 남녀가 나를 매섭게 쏘아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미리 알았다면 찍을 엄두를 내지 못 했을 것이다.'

이갑철


거리의 양키들, 동두천, 경기도, 1984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미군 헌병들이 사복을 입은 한 흑인을 연행해 가고 있었다.

끌려가는 사람이 한국인이 아니라서 그랬는지, 어떤 이념이나 의식이 작동하지는 않았다.

색다른 장소나 상황에 대한 작가로서의 호기심, 사진적 순간성에 대한 관심이 더 컸다.

이때의 순간성은 기계적 형식적 순간성이 아니라

마음을 움직이는 어떤 정조 情調 를 동반하는 순간성이다.

이갑철


도시의 이미지, 종로, 서울. 1985

종로2가 모퉁이 금강제화 앞 건널목 풍경이다.

찍기 전에 카메라 앞에 거울을 내밀어 뒤편 건물의 반영 反影 을 사진에 더했다.

반영을 이용한 이미지의 유희는 리 프리들랜더 Lee Friedlander 가 즐겨 구사하던 수법이다.

따라한다고 해도 나의 존재감은 있다.

이갑철


도시의 이미지, 명동, 서울. 1985

사람의 얼굴만큼 많은 것을 설명해 주는 것도 없다.

대체로 그것은 사진의 모호함이나 긴장감을 앗아가 버린다.

이갑철



다음은 이갑철의 1985~1990년까지 작업한 ‘타인의 땅’ 시리즈에 대한 내용이다. ‘타인의 땅’ 은 독재 정치와 압축 성장으로 대변되는 80년대 혼란의 시기를 주관적 시선으로 포착 해낸다. 이 시대의 혼돈과 사회 구성원간의 이질감을 극명하게 투사하며 그만의 사진 스타일을 확고히 하는 중요한 결과물이다.



'1958년에 출판된 로버트 프랭크의 사진집 『미국인들 The Americans』이

수십 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감동을 주는 것을 보면서

사진이 담아내는 보편적 진실의 힘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더욱 뚜렷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해야 할 작업이 무엇인지 그때 알게 된 것이다.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

내가 직접 보고 느끼는 것을 나만의 시선으로 포착하고 싶었다.

한 시대의 보편적 진실이 ‘나’라는 매개체를 통과하며 사진 속에 담길 것이라 확신했다.

그것이 『타인의 땅』의 시작이었다.

나의 땅도 우리의 땅도 아닌 ‘타인의 땅’이라는 제목은,

격변하는 삶의 배경에 스미지 못한 개인들의 이물감에 대한 술어 述語 이다.

그것은 가깝게는 나 자신에 관한 독백이고,

내 주변, 또는 한국사회로까지 확장되는 술어이기도 하다.'

이갑철



Parade - Hoboken, New Jersey, 1955 © Robert Frank, from The Americans

‘타인의 땅’ 은 누구나 공통적으로 느끼는 사회상이 아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갑철 한 개인이 보고 느끼는 모든 것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직 그만의 느낌으로 표출된 현실이다. 작가는 일상의 직관만이 시대의 감성을 가장 잘 담아낸다는 생각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사진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죽으면 죽으리라 다짐하며 작업을 했다고 한다.

젊은 날 고향을 떠나 전국 방방곳곳을 다니면서 그와 처지가 비슷한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서 마주한 현실은 어쩌면 누구나 자유와 행복을 누려야 하는 땅이 아니라 멀게만 느껴지는 ‘타인의 땅’임을 느꼈을 것이다. 실례로 아래의 사진은 ‘타인의 땅’시리즈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된다. 잠자리도 확실하지 않았던 시기에 초대받은 친구의 집에서 그는 낯선 타인의 삶을 경험하게 된다. 60평이 넘는 아파트에서 골프 연습하는 아버지와 샤워를 하는 친구의 모습은 그가 살고 있는 사회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이질적인 모습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서울, 1986



대부분의 사진은 인물의 얼굴을 제외시키고 뒷모습만 찍거나 인체가 잘려 나간 것처럼 경직된 분위기를 연출한다. 그는 사진 속 프레임 안의 완전하지 않은 간헐적인 정보를 제공하며 불편한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이러한 그만의 사진 스타일은 타자에게 화면 속 세상에 대한 궁금증을 유도한다. 따라서 감상자가 상상력을 더하여 그 모든 이야기를 완성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다큐멘터리 사진이 기록된 이야기와 정보를 공유하고자 한다면 그는 여기에 타자가 동참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1980년대의 한국 사회의 모습을 자신의 삶에 투영시키며 치열하게 작업한 ‘타인의 땅’은 수많은 국내 다큐멘터리 사진가에게 반향을 일으키며 소개되었다.



"할수록 어려운 것이 사진이었습니다.

사진을 조금 안다고 느끼게 되면서 더욱 막막하고, 더욱 괴로운 것이기도 했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이 시대, 이 현실이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삶’이란 무엇이며, ‘시대의 현실’이란 무엇일까?

이 두 가지의 이율배반적인 논리를 어떻게 아픔 없이 해명하며, 극복할 수 있을까?

철학은 긴 사설만 늘어놓고, 예술은 시끄럽게 소란스럽기만 합니다.

나에게 꿈속에서 아련히 들려오는 문밖의 소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타인의 땅’에서 뜻을 잃고 오고 가는 나그네들이 아닐까요?

정말 나의 가슴을 두드리고, 나의 피부를 쓰리게 하는 사진은 무엇인지?

이 번민이 계속되는 한 나의 사진은 방황을 멈추는 날까지 계속되는 숙명이겠지요."

이갑철



타인의 땅, 신촌, 서울, 1987

타인의 땅, 경기도 성남, 1989

타인의 땅, 서울, 1987



'내가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풍경이 나를 본 그 시각으로 찍은 것이다.

우리 선조들의 삶의 한 부분인 정한이나 신명, 끈질긴 생명력을 사진에 담으려고 노력했다.'

이갑철


충돌과 반동, 풍어제, 영덕, 1990

충돌과 반동, 영혼을 보내는 날-아버지의 49제, 산청, 1996



2002년 당시 금호미술관에서는 ‘충돌과 반동’ 이라는 희귀한 다큐멘터리 사진전이 사진계에 큰 파장을 안기고 있었다. 소개된 27점은 모두 흑백 사진으로 완벽하게 다큐멘터리 영역을 확장시켰다. 이는 예술 장르의 벽이 해체된 기념비적인 전시로 기록되었다.


1988년 ‘타인의 땅’ 전시 이후 10여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안동, 경주, 하동, 남원등 전국을 신들린 사람처럼 유랑하면서 그의 이성이 아닌 마음을 움직이는 감각으로 순간의 느낌, 찰나의 움직임을 잡아내기 위한 시간을 보냈다. 특히 별신굿을 찍으러 동해에 갔을 때 ‘아! 이거구나. 이것이 내가 찾던 길이구나’ 라는 확신을 가졌다고 한다. 이렇게 찰나 刹那 에 담긴 모습을 계기로 <충돌과 반동> 은 이미 시작되었다.


‘나는 내가 다녀온 곳 지명도 모른다. 그 곳이 어떤 역사적 의미가 있는지도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고, 친해지기도 싫다.’ 라고 말하는 작가에게서 고집스러움과 자신이 사진이 주최가 되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느낄 수 있다.

남들이 보는 곳을 보지 않고 누구도 근접할 수 없는 지점을 스쳐 지나치듯이 포착하는 방식으로 한국인의 정체성 또는 한국적인 다양한 양상을 사진으로 표현한다. 사진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의미인 ‘기록’을 하지 않는 다큐멘터리 사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엄청난 일을 작가는 <충돌과 반동>으로 해냈다.

이갑철 사진의 독특한 표현 방법인 흔들림, 불안정한 구도, 초점이 나간 흐릿함, 강한 콘트라스트로 인하여 거칠어진 입자는 스트레이트 포토그래피 Straight Photography 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기법이다. 일부러 의도하지 않았지만 이러한 요소들은 필연적으로 드러난 그만의 사진 언어로 자리 잡게 되었다.



충돌과 반동

해탈을 꿈꾸며 1– 상원사, 1998

해탈을 꿈꾸며 2 – 해인사, 1993

해탈을 꿈꾸며 3 – 승주, 1996

해탈을 꿈꾸며 4 – 경주, 1993



한국인의 심층에는 샤머니즘적 요소가 깊게 자리 잡고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현상들은 무엇이고 사람들의 삶과 죽음은 무엇일까?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 영혼이 존재할까? 등의 질문에 이갑철은 묵묵히 사진을 통해서 대답한다. 사진 속에 등장하는 신들린 사람들의 모습이나 기이한 풍경들은 마치 초현실적인 요소들로 현실과 분리되어 보이면서 극적인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작가 자신의 모습과도 닿아있다.


2002년 발표한 <충돌과 반동> 이후 수많은 국내외 사진전에 초대되어 전시 및 각종 언론 인터뷰 등으로 이갑철 작가의 인지도는 급속히 높아졌다. 2007년에는 케 브랑리 미술관 (Biennale des images du monde museum – 프랑스, 파리)에서 주최한 세계이미지비엔날레에 한국을 대표하여 참여하였고, 같은 해 서울시립미술관에서 ‘한국현대사진의 풍경’展에 참여하는 등 굵직하게 족적을 남기고 있었다. 한국사진의 흐름 속에서 쉽게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이갑철의 새로운 행보는 어떻게 실체가 없는 보이지 않는 것을 형체를 통해서 보여주는가에 대한 처절한 자신과의 싸움이 아니었을까? 그의 사진은 이렇게 대상을 바라보는 태도와 방법이 다른 사진가들과 확연히 다르기 때문에 독보적인 자신만의 사진 언어를 구축하게 되었다.



Energy 氣, 봉화, 2004



이후 작가는 언제나 그러하듯 다음 작업을 위하여 5년간 침잠하는 시간을 가진 뒤 <충돌과 반동> 의 후속 작업으로 <Energy 氣> 를 발표했다. 한미미술관에서 열린 본 전시에서는 ‘충돌과 반동’에서 보여 준 한국인의 전통적인 삶의 양태에 대한 시각적 탐구는 사라지고 한국의 자연을 형상화시켜 낸 풍경을 선보였다. 어쩌면 한국인의 정서를 형성하고 있는 근원적인 요소를 ‘자연’이라는 대상으로 삼았는지 모른다. 이렇게 <충돌과 반동> 의 시각적 확장을 볼 수 있는 <Energy 氣> 는 생의 에너지를 분출해내는 것이 비단 사람만이 아니라 동물이나 식물 또는 산과 바다, 하늘과 땅, 바람과 구름 등 만물에 깃들어 있다고 믿고 있는 작가의 세계관을 반영한다. 어쩌면 생의 에너지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은 아니다. 그가 생각하는 ‘氣’는 세상 곳곳에서 만난 모든 생명과 물질 속에서 느낄 수 있다.


불가능은 어쩌면 이렇게 시작된다. 사진이 보이지 않는 것을 담을 수 없지만 그는 바로 보이는 것을 통하여 그것을 획득했다. 채집하듯이 사냥하는 이갑철의 사진은 세계적일 수밖에 없다.



Energy 氣, 해남, 2005



나는 멀리서도 또렷하게 빛나는 작은 별을 볼 때나 눈을 감고 가만히 코끝을 스치는 바람을 느낄 때에도 먹먹한 가슴을 쓸어 안아주는 깊은 바다의 일렁임에서 엄청난 기운을 느끼고 위로 받았다. 하지만 생명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어쩌면 이갑철이 대상을 바라보는 ‘관념의 눈’을 뜨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엄청난 간극을 체감하며 그의 작품을 온전히 감상한다.

이갑철의 작품 속 풍경에서는 분명히 범상치 않은 생명력을 감지하게 된다. 무엇이 이토록 강한 에너지를 발산하게 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 기운이 휘감고 있는 형언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이갑철의 사진을 스쳐 지나간다. 이렇게 그의 사진은 ‘감각 여행’을 가능하게 한다.◼


 

** 살롱사진 (Salon Picture):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유행했던 사진 경향으로 회화주의 예술사진이라고도 한다. 1, 2차 세계대전 이후 살롱사진은 지나치게 회화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사진의 본 모습을 무시하면서 전환기를 맞게 된다. 이후 스트레이트 사진으로 대체되고 리얼리즘 사진이 대두된다.

** 라이프 (Life) 잡지: 1936년 헨리 루스 (Henry Luce) 발행.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사진잡지로 평가 받고 있다. 포토저널리즘이라는 분야를 개척해 대중화시켰다는 점에서 잡지 역사와 저널리즘에 큰 업적을 남겼다. 1960년대 텔레비전 의 등장으로 내리막길을 가다가 1972년에 폐간했다. 현재 는 인터넷으로만 운영되고 있다.

** 포토저널리즘 (Photojournalism): 말과 글 대신 사진으로 시사문제나 사실을 보도하는 언론의 한 분야이다. 보도 기사를 보충하는 역할을 한다.

** 천민자본주의 (Pariah Capitalism):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 (독일어: M. Weber) 가 처음으로 사용한 전근대 사회에 있었던 비합리적이고 비인간적인 폐쇄적 자본주의 또는 그 소비 및 생산 문화를 뜻한다. _자료: 위키피디아

** 정통 사진 (Straight Photography): 사진의 본래적인 표현을 강조하여 연출이나 필름의 수정, 인화과정에서의 회화적인 특수 표현 등을 하지 않는 방식이다. 사진을 독자적으로 예술적 가치를 가진 순수예술이 되도록 이끌었던 사진적 경향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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