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WA Critique] 피고 지며 지속하는 많은 세계들 - 이학(Hak Lee)

August 29, 2017

 

 

한쪽눈떨림, 130.3 X 162.3cm, Mixed media on Canvas, 2017

 

이학의 전시장에는 수많은 꽃들이 피고 진다. 꽃들만큼의 세계도 피고 진다. 동서고금의 많은 화가들이 꽃을 그렸지만 꽃을 그리는 사연은 이세상의 꽃만큼이나 많을 것이다. 아무 사연도 없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꽃을 그렸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현대미술은 너무 아름답거나 의미가 있는 것은 오히려 제쳐두려는 경향도 있다. 현대 미술가들은 눈에 띄지 않는 소재를 눈에 띄는 형식으로 표현하기 위해 애쓴다. 현실에 대한 괄호치기는 조형언어의 혁신에 방점을 찍어온 현대미술의 경향이다. 언어를 강조할수록 소통과 멀어지는 역설도 생겨났다. 언어는 투명하게 뭔가를 전달 해줘야 하는데, 현대적 언어는 자신의 자율성을 강조하면서 그자체로 불투명해지기 때문이다. 그러한 불투명 속에서 예술에 대한 각종 법칙들이 경쟁한다. 미술사의 흐름, 영향 관계 등등의 미학적 담론은 역사의 기원과 목적을 가정하는 역사주의적 관점에서 생겨난 것이며, 무익한 문화 교양 수업의 주제가 되곤 한다.

 

그러한 경향은 현대미술과 대중을 멀어지게 하고, 지루한 반복 가운데서도 간혹 선정성(거짓된 새로움)을 필요로 하는 대중문화의 소비품목으로 전락하기도 했다. 누군가 꽃을 그리고 있으면, 또 그것의 의미가 무엇이라고 구구절절 밝히려고 한다면 그는 소박한 아마추어로 간주될 수도 있다. 제목이 문장을 이룰 만큼 긴 이학의 꽃그림 역시 작업을 통해 관객에게 하고픈 말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작품 제목이 길다고 해서 그림의 의미가 자명하게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선인장 꽃은 기르기 쉽지 않아요](2016)같이 앞뒤의 맥락이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다. 쓰고 그 위에 또 쓴 공책처럼 지워지고 겹쳐진 층들 가운데서 명멸하는 글자들을 정확히 읽을 방도는 없다. 어디에 피어있는 무슨 꽃인지 알 길 없는 그것들은, 그림의 가장 보편적인 소재 중의 하나를 형식적으로 끌고 들어왔을 뿐, 그리기라는 장(場)으로 해체되어 버리고 만다.

 

여러 재료를 쓴 걸쭉한 느낌의 바탕은 꽃이라고 생각되는 형상과 경쟁한다. 작품 [1회의 정열적인 키스는 평균 125kcal가 소모된다고 한다](2016)는 밝은 바탕과 꽃이 서로 화면의 전면을 차지하려 하며, 작품 [꽃잎을 가끔씩 뒤집어 주세요. 그들이 고르게 시들 수 있도록](2016)은 하얀 바탕에 떠있는 꽃을 보여준다. 어두운 바탕에 밝은 꽃뭉치들의 조화가 있는 작품 [별들은 귓속에 별들처럼 웅성거리고](2016)와 달리, 작품 [꽃을 사지 않는 남자의 시선](2015)에서 꽃들은 바탕에 묻혀가는 중이다. 이처럼 이학의 작품 속 꽃들은 불투명한 바닥으로 침수될 것 같다. 그것들은 기억되기 보다는 잊혀지려 한다. 배경과 형상은 밀고 밀리면서 매순간 자기자리를 유지한다. 처음부터 정해진 자리는 없다. 그의 꽃들은 잔인한 과정을 통과하고 있다. 시들고 뭉개진 꽃까지 모두 포함하는 그의 꽃은 유체적이다. 아크릴, 파스텔, 잉크, 젯소 등 다양한 재료들은 엉기고 흘러내리며 층을 이루고 붓터치가 강하게 드러나는 스타일이라서 유동적인 느낌은 더욱 강하다.

 

유체는 고정되지 않고 과정 중에 있다. 그것이 만약 고체라면 많은 층을 가진다. 그림은 물리적으로 움직이지 않지만, 이학의 작품 속 층들은 유동적이다. 그래서 볼 때마다 낯설다. 특히 많은 작품에서 발견되는 것은 줄줄 흐르는 물감이다. 시작은 작가가 하지만 끝은 자연(흐름, 중력)이 완성한다. 그것은 학창시절 수채 담당 선생님의 ‘물은 언제나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는 말과 관련된다. 지상에 우뚝 선 존재가 적극적인 삶을 떠올린다면, 아래를 향한 방향은 비극적이다. 이학의 작품 속 식물은 지상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는 존재가 아니다. 온전한 모습은 별로 발견되지 않는다. 식물의 주기에서 꽃이 차지하는 순간적인 시공을 생각하면, 그의 그림에서의 꽃의 비참한 몰골은 과장이나 왜곡이 아니다. 작가는 아름다움의 절정만을 보려하지 않는다. 그것이 필 때까지의 고통, 잠시의 개화 이후 질 때의 고통, 그 모두가 아름다움에 속한다고 믿는다.

 

씨앗에서 다시 씨앗으로 돌아가는 식물의 순환적 과정은 이전 단계의 파괴의 연속이다. 그래도 자연은 인간의 규칙과는 달리, 온전히 다시 시작되는 법칙에 따른다. 식물적 삶은 근대 이후 보편화된 선적인 진보의 역사관과 달리, 영원히 회귀한다. 영원회귀는 자연에 바탕 한 삶을 살던 시대의 사고, 즉 역사 이전의 사고이다. 근대 역사주의의 전성기에 영원회귀를 통해 신화적 사고를 복귀시킨 대표적인 사상가는 니이체이다. 알렉산더 네하마스는 [니체, 문학으로서의 삶]에서 니체는 회귀를, 역사를 구성하는 개별적 사건이 아니라 자연의 주기의 무한한 반복을 강조하는 종교인 디오니소스 사상과 연결시킨다고 말한다. 디오니소스 사상은 쇠퇴와 부패까지도 포함에서 이들 주기의 모든 단면들을 찬양한다. 모든 존재는 지금 시작한다. 이러한 현재성이 강조하는 것은 회상보다는 망각이다. 여기에서 망각은 능동적이다.

 

니이체에 의하면 망각의 힘으로 인간은 자유롭게 현재를 고찰할 수 있고, 투명한 시각과 의지를 가질 수 있다. 회상하는 힘은 인간으로 하여금 고정된 과거나 특정한 미래에 자신을 결합시키는 나쁜 성향이라고 비판하는 니이체에게 (역사적)기억은 극복의 대상이 된다. 재현보다는 생성이 중요하다. 니이체에게는 생성하는 것만이 회귀할 수 있다. 생성을 주도하는 주체는 이학의 이전 그림에서 발견된다. 요즘에 그리고 있는 야생적인 꽃그림은 화관을 쓴 숲의 신 디오니소스를 연상시킨다. 그의 인물화나 슈퍼히어로 시리즈는 디오니소스를 모델로 하는 초인이다. 작품 속 그들은 21세기형 초인인 셈이다. 니이체에게 빼어난 예술신이 되었던 모델은 아폴론적인 디오니소스였다. 귄터 볼파르트는 [놀이하는 아이, 예술의 신 니체]에서 디오니소스적인 전통을 통한 비극의 탄생과 소크라테스를 통한 비극의 사멸을 말한다. 그에 의하면 디오니소스, 즉 예술가-신은 소크라테스와 대립되는 위치에 있다. 소크라테스란 아폴론적 명료함과 투명성, 지식의 빛과 자기 인식이 인격화 된 것이다.

 

대조적으로 디오니소스는 바커스적 열광과 춤의 어두운 경사, 황홀한 사랑에 취한 자기망각을 나타낸다. 종말을 극복하고 되돌아올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자가 바로 초인이다. 니이체에게 세계과정은 합리적, 진보적이라기보다는 심미적, 순환적이었다. 세계의 모든 것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 하나의 변화가 모든 것의 변화를 동시에 초래한다. 이것의 이상적인 모델은 예술작품이다. 예술은 선적 진보를 가정하는 역사나 과학과 달리, 무한 회귀하는 자연의 편에 선다. 적정한 수준의 자연적 경쟁과 달리, 인간관계를 포함한 삶의 많은 갈등이 양면에서 한쪽 면만을 취하려는 편의성 때문에 생겨난다. 세상이 더욱 편리해질수록 갈등 또한 커진다. 예술이 굳이 어느 편에 서 있는지 묻는다면, 그것은 갈등일 것이다. 이학에게도 그림은 갈등의 장이다. 물론 예술은 갈등의 해법은 아니다. 다만 예술은 그 갈등을 보다 극적인 방식으로 표출시켜 문제화한다. 그것이 예술의 사회적 기능이다.

 

이전의 작품들을 염두에 둘 때, 이학에게 자연은 사회로 나아가는 과정에 등장한다. 이학은 근대에 특유한 예술적 고립을 원치 않는다. 그는 거리에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꽃이라는 자연적 대상이나 슈퍼 히어로같은 대중적 주제 또한 그러한 의지의 산물이다. 그는 그림이라는 실재를 위해 자연이라는 실재를 호명한다. 한갓된 가상이나 장식을 넘어서 삶의 핵심에 놓이는 작품은 실재적이다. 단순한 현상이나 현실이 아니라, 바다와 대지 같은 자연에서 발견될 수 있는 실재계 말이다. 이학의 작품에서 꽃은 어떤 한 순간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 과정 중의 그것들은 바다나 대지의 운동을 그리기로 실험한다. 전시장에는 온통 꽃그림이지만 그가 꽃을 그린 것은 몇 년 되지 않는다. 어두운 바탕에 희고 붉은 꽃들이 떠있는 작품 [고백](2017)에서는 다른 작품에서 많이 발견되는 흘러내림은 별로 없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선물하기 위한 그림 꽃다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연한 호감으로 기다리는 것에 대하여](2017)를 보면, 꽃의 구체적 형태는 찾기 힘들다. 검은 영역에 하얀 물감이 눈에 띄는 추상 표현주의적 방식이다. 같은 제목의 또 다른 작품은 밝은 바탕에 붉은 꽃이 잠겨 있는 듯하며, 작품 [그는 항상 우산을 잊어버린다](2016)는 하얀 꽃들이 녹아내리는 듯하다. 작품 [한쪽 눈 떨림](2017)에서 흐르는 물감은 분출된 체액처럼 보인다. 작품 [빳빳한 옷깃이 당신의 목에 쓸리면](2017)은 무채색 톤이라서 그런지 꽃들이 빈 중심을 향해 머리를 모으고 있는 모습이 영전에 바쳐진 꽃들 같다. 이전의 작품 목록을 볼 때 비어있는 중심에는 인물이 있었다. 거기에는 대중문화 속의 영웅들과 그 연장 선 상에 있는 개인의 초상이 포함된다. 혼합재료에 붓터치가 강하게 남는 강렬한 형식 또한 연속적이다. 이전의 인물이 지금의 꽃이 된 셈이다. 표현주의 터치의 강렬한 인상이 꽃으로 전이되는데, 꽃들은 뻗치는 제힘에 못 이겨 몸살을 앓고 있다.

 

청춘은 ‘도전, 자유, 혼돈, 광기, 상처’이며, ‘피가 뚝뚝 떨어지는 듯한 날 것을 그리고 싶었다’는 젊은이다운 생각은 대중문화의 도상부터 꽃까지 일관되게 관철되고 있다. [waiting for heroes] 시리즈는 미국에서 공부할 때의 작업이다. 그는 그때의 작업 노트에서 ‘슈퍼 히어로들과 소년 소녀의 이미지들은 우리들의 유년시절로부터 잉태되어 가슴 속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자신감과 열정을 의미하고 있다’고 하면서, 그들은 ‘현대인들에게 현실의 험난함을 뛰어넘어 어린 시절 존경과 동경했던 만화책 속에 등장하던 영웅의 부활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슈퍼 히어로는 어린 시절의 순수한 호기심과 열정을 간직하고 있다. 헐크나 아이온 맨 등, 꽃만큼이나 전 세계적으로 공유된 도상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지금의 뭉개진 꽃들처럼, 현재는 ‘낡고 헤져’ 있으며, ‘안개 속에 얼어붙은 듯’ 하다. 그렇지만 언젠가 다시 부활할 수 있을 것이라 믿어진다.

 

그것이 부활하지 않는다면 놀이의 또 다른 차원인 예술은 불가능하다. 이학의 작품에서 꽃그림과 슈퍼 히어로 시리즈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식물은 부활에 대한 인류의 상상을 가능케 했던 자연적 실재임이 확인된다. 부활, 즉 다시 회귀해야 하는 존재는 초인처럼 강인하다. 슈퍼히어로 시리즈에 등장하는 엄청난 파워를 내장한 낯익은 도상들은 밝은 바탕에서 등장하는 색-형태이며, 이후의 인물화나 꽃그림에서도 같은 방식이 유지된다. 인물화는 나르시시즘적으로 눈을 감고 있거나 전방을 응시한다. 피 튀기듯이 생생하게 남아있는 수많은 붓터치는 야성적이다. 대상의 고유색과 무관한 색선의 흐름들은 이글거리면서 얼굴을 생성한다. 그렇게 거친 색선과 함께 남겨진 밝은 얼룩들은 상처나 죽음을, 동시에 인물이나 화면에 생기를 부여한다. 30대 중반의 그는 한창 작업에 속도를 낼 시점이지만, 그림을 일찍 시작한 것은 아니다. 29세에는 자신이 색약인 것도 알게 됐다. 여러 가지 악조건 속에서도 이제 와서 주변을 돌아보면 자기만 ‘아직도’ 그림을 그리고 있다.

 

누구보다도 그림을 일찍 시작했거나 잘 그리거나, 심지어는 열심히 했던 이가 작업을 끝까지 지속하는 것만은 아니다. 시작과 목표가 아닌, 과정과 지속에는 의지와 운이 필요하다. 운이 영원회귀 사상에 나오는 절적한 타이밍의 문제라면, 의지는 플라톤이 말한 패기(thymos)와 관련된다. 패기는 이성이나 욕망과도 구별된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말]에서 욕망과 이성이 자기 보존에 관심을 가진다면, 패기는 자신의 자유를 인정받기 위한 행동을 중시한다고 해석한다. 패기에 관한 사상은 젊은 작가로서는 절대 절명인 안정과 인정(recognition), 양단간의 선택에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이성과 욕망은 안정을 가져다주지만, 그러한 안정과 예술적인 것은 거리가 있다. 후쿠야마에게 ‘역사의 종말’이 야기된 것은 이성과 욕망 때문이다. 그러한 ‘역사의 종말’이 경멸해야할만한 사태인지, 다행스러운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각자 다를 것이다. 그러나 이성과 욕망이 지배하는 세계가 낳은 균질한 문화를 거부하고자 한다면, 패기는 그 대안이 된다.

 

패기는 개인적 욕망에 가득한 경제적인 인간의 자기만족이나 합리적 이성과 구별된다. 패기는 타자에게 인정받고 싶어 협소한 육체적 관심사를 희생하고 지고한 목표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자기극복의 전통이다. 후쿠야마에 의하면 홉스나 로크같은 근대초기의 자유사상가들의 생각했던 시민사회는 정열을 포함한 패기보다는 욕망과 이성을 중시하였다. 앵글로 색슨의 전통은 귀족적인 우월감보다는 자연법적인 욕망 충족의 평등을 추구한 것이다. 그것은 육체적 안전과 물질적 풍요만을 추구하는 결과를 낳았다. 욕망과 이성에 비해 패기가 중요하다면, 새로운 규칙과 가치를 창조하는 예술 또한 중요해진다. 이학의 야생적인 작품들은 삶의 중심에 예술을 회귀시키려는 예술가다운 예술가를 반영한다. 역사주의 시대에 신화적 사고를 불러일으키며 초역사를 주장하고 그 중심에 예술을 놓은 니이체는 패기의 열렬한 옹호자였다. 그러나 후쿠야마와 같은 거시적인 관점이 아니라, 개인의 삶의 주기로 볼 때, 패기란 나이를 먹을수록 점차 줄어드는 에너지다.

 

이러한 에너지의 흐름에 역행하여 다시 회귀하기 위해서는 초인적인 능력이 요구된다. 그래서 니이체라는 초인의 사상가는 동시에 패기의 사상가이기도 했다. 욕망과 이성에 대한 패기의 우위를 재천명한 예술가적 철학자는 노예적인 근대인, 즉 쾌적한 자기보존이외에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인간들을 경멸했다. 그것은 귀족주의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근대의 민주주의는 형식적인 면이 있었기에 공감을 받았다. 차이를 추구하는 예술은 민주주의와 늘 상 조화를 이루는 것은 아니다. 예술을 포함한 사회의 전면적인 시스템화는 이성과 욕망을 동력으로 가속도를 밟아왔다. 이러한 경향은 안전을 보장하지만 권태롭다. 아니, 시스템화가 더욱 가속화되면 안전하지 조차 않다. 근대적 시스템의 위기는 강렬한 심미적 사고를 불러일으켰고, 그 대표자인 니이체를 호출했다. 이학의 작품에서 감지되는 초 역사나, 신화, 초인 등의 이미지는 근대의 역사적 진보나 합리적 이성, 맹목적 욕망에 대한 비판이 드세지고 있는 탈근대사회에 다시 회귀하는 사고와 감성이 유미주의임을 알려준다.■

 

이선영 미술평론가

 

 

이선영 미술평론가

 

이화여대 생물학과 졸업, 홍익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수료.

199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 부문으로 등단.

1996-2006년 [미술과 담론] 편집위원 역임.

2003-2005년 [미술평단] 편집장 역임.

2006년 제1회 정관 김복진 미술 이론상 수상.

2009년 한국 미술평론가 협회(이론부문)상 수상.

2014년 AICA Prizes for Young Critics 수상.

Please reload

보관
Please reload

태그 검색
Please reload

공식 SNS 페이지
  • Facebook Basic Squ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