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WA Critique] 디지털 생태계에서의 나날들 - 김화중

January 3, 2018

CCTV Road, 116.8 X 91 (cm), Digital Print, 2017

 

 

20대 후반 다시 작업을 시작하려는 젊은 작가 김화중에게 가상현실은 현실의 다른 이름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의 일상에 편재하는 CCTV를 활용한 작품이나 생체정보에 관련된 작품, 사이버 공간 상에서의 실시간 대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드로잉 등은 붓을 포함한 어떤 필기구보다도 키보드를 먼저 만지고, 그것과 더 친숙했을 세대의 자연스러운 산물이다. 그는 7살 정도에 처음 전자 오락기기를 접했으며, 한번 빠지면 못 빠져 나온다는 게임도 많이 했다고 회고한다. 그의 세대보다 이전세대가 현실로부터 가상현실로 나아갔다면, 그의 세대는 가상현실로부터 현실을 재구성하는 순서를 밟는 것이 자연스러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화중의 작품은 새로운 프로그램을 제작해야 할 정도로 가상현실과 내재적인 것은 아니다. 새로운 기계가 번쩍번쩍 하는 것도 아니다. 최근 작품에서 그가 사용하는 주요매체는 카메라나 펜 등 소박한 것들이다.

최근의 작품은 펜으로 그려 사진으로 찍어 업데이트 하고 피드백을 받으면서 진행한다. 가상현실에서 발설된 온갖 것들이 한데 얽혀있는 김화중의 드로잉들은 가상현실이 일시적인 흥밋거리를 미끼삼아 일상의 잡다함에 매몰시키고 있음을 알려준다. 물론 일상의 잡다함은 편안함이기도 하다. 그러나 또 다른 차원이 있지 않으면 가상현실 자체도 황폐화되고 만다. 가상과 현실에는 적정한 거리가 필요한데, 점차 사라지고 있는 것이 이 거리인 것이다. 그러나 이미 가상현실의 재미와 편리함을 맛본 중들은 그 세계를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무엇이 중독인지도 알 수 없을 만큼 생활의 일부, 심지어는 몸의 일부가 된 것이 가상현실이다. 가상현실은 살아있는 몸과의 차이를 줄이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으며, 몸은 기계화, 즉 좀 더 수동적으로 된다. 김화중은 깨어있는 시간동안 계속 접속되어 있는 또 다른 현실, 즉 소비로만 끝나기 쉬운 ‘소통’에서 정보의 소비자가 되기보다는 생산자의 입장에 서보려 한다.

그것은 단지 가상현실과 예술이 하나가 된 것이 아니라, 가상현실에 대한 예술인 것이다. 소재가 아무리 중요하다할지라도 예술이라면 필수적인 거리감이 존재한다. 이러한 거리감은 자신이 속한 계에 대한 가벼운 풍자부터 심각한 비판에 이르는 태도를 낳을 수 있다. 김화중의 작품에서 가상현실은 작품의 시작과 과정에서 변수가 아니라 상수이다. 그것도 아주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그는 자신의 작업이 디지털 생태계를 바탕으로 한다고 말한다. 날로 진화하는 가상현실은 대중으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몰입하게 하지만, 전적으로 매몰되어서도 안 되는 현실이다. 가상현실은 이제 없어서는 안 될 것이 되었지만, 동시에 가장 값싼 여흥거리가 되어 대다수 사람들의 많은 시간을 붙잡아 놓을 가능성이 크다. 흡사 좀비처럼 스마트 폰만 보고 거리를 걷는 사람을 많이 발견할 수 있듯이, 가상현실은 대중을 흡입한다.

그것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을 거의 실시간으로 전달해준다. 그리고 SNS나 블로그 등 자신에 대한 것들도 섞여 있다. 자신과 세상의 크고 작은 사건들이 뒤죽박죽되어 한데 흘러가며 주체라고도 객체라고도 할 수 없는 모호한 상황에 항시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사업과 연결시켜서 대중의 일거수일투족, 그리고 그들의 의식과 무의식을 활용하고 있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자신의 몸과 마음, 그리고 물질적 에너지를 매순간 투입한다. SF 영화에서 인간이 기계의 숙주가 되는 경우는 많이 등장하는 상상력이다. 기계라는 도구를 이용하느냐 이용당하느냐의 문제는 영원한 화두가 될 것이다. 도구가 있으려면 주체와 대상이 있어야 하는데, 그 범주가 과거처럼 확실하지는 않다. 가상현실 속 정보나 이슈들이 일회성으로 흘러가는 사실은 작가의 관심을 끈다. 거기에는 새로움과 진부함이 표면과 이면처럼 붙어있으며, 그 두께는 매우 얇아서 금 새 앞뒷면의 위치를 바꾸곤 한다.

디지털 생태계의 몸통이라고 할 수 있는 가상현실은 지난 세기 말에 등장한 당시, 그 출발부터 유토피아적 계기와 디스토피아적 계기를 동시에 함축했다. 크리스 체셔는 [가상현실의 식민화]에서 1989년 ‘가상현실’의 등장과 뒤이어 전개된 미디어를 통한 그 발상의 대중화, 그리고 컴퓨터 내에서 새로운 현실을 구축하는 것은 기술 유토피아주의의 새로운 형태였다고 말한다. 크리스 체셔는 머리에 쓰는 시연장치는 1980년대 초에 미 공군이 개발한 것으로, 그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체계는 조종사들이 덜 추상적이며 더 직관적인 방식으로 자료에 접근할 수 있도록 제작되었음도 밝힌다. 가상현실은 생활의 편리와 재미를 주는 전능한 도구이자, 경쟁과 전쟁으로 연결되기 마련인 첨예한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일부가 된 그것은 무엇보다도 가장 뜨거운 사업 아이템이다. 가상공간이 현실 및 현실공간을 식민화함에 따라 그 명암은 더욱 강하게 대비될 것이다.

 

 

 

 

CCTV Road, 116.8 X 91 (cm), Digital Print, 2017

 

 

 

김화중의 작품 [CCTV Road]는 정보사회의 어두운 면이 반영된 작품이다. 그것은 군복무 기간 동안 감옥에서 수용자들을 감시했던 경험으로부터 온 것이다. 그는 수용자들을 감시하기 위해 설치된 CCTV는 자신 또한 부자유스럽게 했다고 회고한다. 군인이라는 특수한 신분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감시하는 자는 감시당하는 사람만큼이나 얽매인 존재이다. 그러한 비효율성을 극복하기 위해 패놉티콘이 구상되기도 했다. 공리주의자 제러미 벤담의 고안인 패놉티콘은 감시자의 부재 상황에도 감시당하는 느낌을 줌으로서, 권력이 자동적으로 작동하게 하는 건축적 장치였다. 이러한 원리는 오늘날 감시카메라로 전달된다. 그는 범죄예방이라는 명목하게 설치된 수많은 CCTV의 지점들을 연결하여 파노라마같은 이미지로 만들었다. 거리 곳곳에 깔린 감시카메라의 위치와 각도를 활용하는 것 외에, 사진, 꼴라주, 디지털 프린트 등의 방식이 사용되었다.

꼼꼼하게 작업한 그의 작업에는 거의 사각지대가 없을 만큼 촘촘한 시선의 그물망이 발견된다. 그가 걸었던 거리 뿐 아니라 그가 활용했던 지도 또한 어디선가 보는 시선을 암시한다. 보는 시선을 의식하며 보여주기 위한 행동이 생겨난다. 가령 위성으로 감시되는 적국의 시선을 속이기 위해 풍선으로 만든 가짜 무기(dummy)들을 배치하기도 한다. 가짜 감시카메라는 진짜 감시카메라만큼이나 많고 효율적일 것이다. 일상생활에서는 사소한 클릭 하나하나가 어딘가에 쌓여 빅 데이터가 되고 마케팅의 자료로 활용되기도 한다. 감시를 넘어서 조절의 시대가 왔다. 감시가 외적이라면 조절은 내적이다. 작가가 군복무 중에 감시하는 자로서의 자의식을 가지게 되고, 그것이 자신에게 피드백되는 상황을 인지했듯이 말이다. CCTV 자체가 상시적으로 보여진다는 것을 의식하게 하여 범죄를 예방하는 도구다. 이러한 촘촘한 감시망에도 불구하고 사건은 터지기 마련이며, 그것은 범인검거의 단서로 쓰일 수 있다.

생체정보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단서의 단위가 좀 더 미시적이 됨을 알려준다. CCTV에 얼굴이 찍혀서 성형수술을 한다 할지라도 유전자까지는 바꿀 수 없을 것이다. 적어도 현재까지는. 작품 [Biometric Portrait]는 ‘사적인 개인정보가 점점 공적인 정보가 되어가는 현재, 우리는 어떻게 자신의 고유성 나타낼 것인가 라는 자문으로부터’ 출발했다. [Biometric Portrait] 시리즈는 현재까지는 지문이나 치아 정보, 필적 등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홍채나 망막, 정맥, 음성, 걸음걸이 등 점차 그 범위를 넓혀간다는 계획이다. 그의 작품은 내가 나임을 인증하는 기준은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이상적으로는 자신의 생각, 감성, 행동 등이 타인에게 인정받길 원한다. 누구도 자신의 어느 한 면으로 단정받길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로 나는 좀 더 단순한 요소로 환원된다. 정보론적 관점에서 본다면 코드화된다.

개인을 식별할 수 있는 코드는 유전자 정보부터 주민등록증에 이르기까지 매우 많다. 익명적 다수가 우호적으로 또는 적대적으로 수시로 부딪히며 사는 현대 사회에서, 그가 누구든 최대한 빨리 검색할 수 있는 분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지문에 나타난 복잡한 굴곡 면들을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만든 작품이나 자신의 치과진료 기록을 바탕으로 한 작품은 매우 낯설다. 그의 것이라서 낯선 것이 아니라 그 누구의 것이라도 마찬가지이다. 개인의 필체를 파악하기 위해 ‘한글로 표현할 수 있는 받침 없는 글씨 399개’의 이미지가 있는 작품은 글자의 물질성이 강하게 느껴진다. 작품에는 총 1,596자가 적혀있는데, 그것은 글자를 통해서 무엇을 읽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글자를 통해서 무엇이 의미화 된다면 그것은 의식의 산물이며 투명하다. 그러나 글자가 그자체의 물성으로 드러난다면 그것은 무의식의 산물이며 불투명하다.

예술적 소통은 일반적 소통과 달리 불투명함에 의존한다. 산문과 시를 비교해 보라. 시는 산문의 언어에 비해 불투명하여 잘 이해가 안가지만 매우 함축적이어서 시시콜콜한 산문적 묘사보다 더 많은 울림을 준다. 그러나 그러한 불투명함을 최대한 줄여가는 것이 정보사회의 진화 방향이다. 정보의 입장에서 불투명함은 제거되어야 할 잡음이다. 김화중의 작품이 제시하는 개인의 인증 요소는 전통적으로 ‘인간’이라고 할 때의 기준은 아니었다. 그것은 대부분 새로운 과학기술에 의해 생겨난 기준이다. 범죄 수사에서 이 기준은 소급 적용되기도 한다. 기존의 인간중심주의에를 탈 중심화하면서 인간 이후(post-human)를 이끈 것은 과학 기술이다. 그리고 예술도 그에 상응하는 움직임을 보여주었으며, 이를 통해 비로소 현대예술이란 것이 정립된다. 누보로망이나 미니멀리즘 등이 대표적이다. 기술은 인간이 발명/발견/발전시키는 것이지만, 동시에 인간에게 피드백 된다.

기계를 비롯한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은 도구화된다. 얼굴, 몸, 사고방식, 성격 등 여러 가지 인간적인 지표는 요즘 같은 나 홀로 족 시대에 변별력이 없다. 몸을 움직여서 나타나는 개인의 이미지에서, 팔 길이와 다리두께, 무릎위치, 팔꿈치, 손바닥, 손가락 등을 이미지화한 김화중의 작품은 사람을 인식하는 방식이 매우 이질적임을 알려준다. 단채널 영상 작품인 [Moving Portrait of Myself]는 ‘행동학적 특성을 이용한 자화상’으로, 3분 40초간 몸으로 표현할 수 있는 큰 동작을 취하며, 신체의 길이와 두께가 가지는 특징을 이미지로 옮긴 것이다. 그것은 작품의 목적대로 ‘개인만이 가지는 이미지로 재현’되었을까. 그의 결과물은 인간으로부터 출발했지만, 곧 인간을 초월한 바우하우스의 무대 실험을 떠올린다. 미학적이든 사회적이든 근대적 시스템이 전제하는 기능주의에서 더 이상 인간은 중심에 놓일 수 없다. 인간 대신에 경제적 효용성이나 자본의 이익이 자리하는 흐름을 쉽게 감지할 수 있다.

인간과 구조(체계)는 서로를 낳으며 경쟁한다. 주체가 자기동일성을 확증할 수 있는 요소들은 갈수록 추상화된다. 김화중이 작품으로 제시하는 기준들은 인간적이기 보다는 기계적으로는 더 잘 파악되는 요소들이다. 지문인식은 컴퓨터 프로그램이 더 잘할 수 있다. 자기 지문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리고 친구의 것은? 어떤 체계에서는 결정적 요소가 다른 체계에서는 불확실하다. 나의 기준은 무엇이며, 더 나아가 인간의 기준은 무엇인가를 묻게 될 때, 인간과 더불어 진화하고 있는 기계는 중요한 비교점이 된다. 이러한 비교가 성립되기 이전에 인간이 먼저 상당부분 기계화되었다. 인간보다 먼저 도구화된 동물은 인간보다 먼저 기계로 간주되었다. 인간-기계론(라 메트리)이 나오기 전에 동물-기계론(데카르트)이 나왔다. 인간을 확장하는 기술로서의 기계는 단순한 노동의 도구부터 상시적인 접속으로 진화했다.

그것은 인간의 확장이자 복속이다. 나날이 발전하는 기술은 인간의 육체를 가상현실에 더 많이 의지하게 한다. 현대의 대중은 사고방식과 욕망까지 지배하는 회로망 안에서, 그림자의 세계를 진짜 세계로 아는 플라톤의 동굴 속 묶인 죄수들이다. 단순한 일 뿐 아니라, 사람만 할 수 있는 일들이 대거 인공지능(AI)로 이동하는 중이며, 사람들은 곧 자신을 초월할 수 있는 기계들에게 그 자료를 대주고 있다. 해방과 억압을 동시에 함의하고 있는 전능한 데이터뱅크는 예술가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가는 데이터뱅크에 접근하여 새로운 게임의 수를 둘 수 있을 것이다. 리오타르는 [포스트모던 조건]에서 그러한 기대를 밝히면서, 데이터뱅크가 현대시대의 자연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현대인은 그러한 자연에서 살고 생산하고 소비할 것이다. 마크 포스터가 [뉴 미디어의 철학]에서 주장하듯이, 정보사회는 생산의 사회를 상당부분 변형시켰다.

전통적인 자연에서의 생산은 기호화된 생태계에서의 생산과 그 강조점이 달라진다. 가상의 근거는 궁극적으로는 실재에 있을 테지만, 그것은 점점 더 숨겨진다. 실재라는 최후의 심급은 신처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무시될 정도가 된다. 실재는 너무 비천해서, 또는 숭고해서 괄호 안에 묶인다.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이 큰 반향을 일으킨 것은 그가 가상(시뮬라크르)에 의한 실재의 폐기를 설득력 있게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림은 가상이 아니라 실재의 영역에 속한다. 그것은 여전히 육체와 물질에 끈끈하게 엮여있다. 김화중은 디지털 펜이 아니라 실제의 펜을 사용한다. 포토샵 보다는 사진을 활용한다. A4 사이즈의 규격을 지킨 드로잉 시리즈는 디지털 생태계라 할 만한 보다 포괄적인 영역을 바탕으로 하는 작업이다. 익명의 사람들과 실시간으로 나눈 대화를 활용한 삽화들이다. 일관된 목적을 가지는 것은 아니고, 대화방에 흘러든 대화 속에서 그날그날 사회적 문화적 이슈가 되는 쟁점들이 반영된 드로잉이다.

많게는 동시에 수십 명이 참여하곤 하는 대화에서 소재나 주제는 제한되지 않는다. 작가는 매일의 대화를 통해 꾸준히 쌓아가고 있는 드로잉들이 그자체로 작품이기 보다는 차후의 본격적인 작품을 위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 작품들은 일정한 규격, 그리고 매일 실행한다는 규칙성을 빼고는 두서가 없다. 온라인상의 대화가 그렇듯이 말이다. 김화중의 드로잉은 앞사람이 그린 그림을 보지 않은 채로 이어서 그리는 놀이를 했던 다다(DADA)의 정신분열증적인 작품이 떠오른다. 여기에서 언어적 시각적 무의식은 차후에 발견되어 해석될 것이다. 온라인상의 대화를 바탕으로 한 김화중의 작업은 ‘그리고’의 연속 외에는 유의미한 접속사가 없는 단편들의 세계로 나타난다. 리오타르는 정보화 시대의 문화와 예술의 상황을 살펴보는 책 [포스트모던 조건]에서 ‘현대예술은 전통적 담론이 갖는 통사구조가 와해되어 가장 기본적 접속사인 그리고로 연결된 짧은 문장들의 병렬적 연속으로 이루어진다’고 묘사한 바 있다.

대부분 밑도 끝도 없이 흘러가는 세계는 자유로움과 공허함을 동시에 야기한다. 대중들이 다소간 흥미롭게 여기는 것들이 느슨하게 나열되어 있는 이 세계에서, ‘그러나’나 ‘그러므로’ 등, 또 다른 접속사가 요구되는 순간, 그것은 논리적 판단의 영역에 속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철학자나 수학자의 몫 아닌가. 우리는 각 분야의 전문가가 업데이트 한 것을 검색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대중은 에너지가 투입되어야 하는 과정인 판단으로부터 면제받으려 한다. 그래서 누군가 지배적 관점을 조장한다면 쉽게 수용한다. 정보화 사회에서 도그마가 사라질 것이라 보는 것은 지나친 낙관주의이다. 작가가 판단하는 대중들의 관심사는 순간적이다. 그는 대화 상대의 요구를 그림으로 그리면서, 뭔가를 이어가려 하지만 쉽지는 않다. 디지털 생태계는 순간들이 지속되는 세계이다. 지구 한 귀퉁이에서 일어난 대재난과 드라마의 내용이 동일한 반열에 있다.

중요한 내용이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지 않은 것들에 묻혀버린다. 김화중의 드로잉에는 자신도 참여하는 중인 대화의 내용이 담긴다. 대화 상대자들은 가령 ‘춤추는 동물의 엉덩이를 그려줘’부터 ‘미국과 북한의 관계를 그려줘’ 등까지 다양한 요구를 한다고 한다. 그는 면대면의 대화가 아니라 문자를 통한 다수의 대화에 내재된 두서없음 자체를 그대로 작품화한다. 드로잉들 간에 전혀 공통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다스는 누구껍니까’ 같은 나름대로 진지한 시사적 주제나 ‘공부 핵 노잼’, ‘전 모쏠인지 25년입니다’같은 외계어 화법 등, 현재를 반영하는 문화가 드러나기도 한다. 언어와 기호, 이미지를 함께 섞어 쓰는 화법은 보편적이다. 맥락이 유지되는 한 그런대로 소통된다. 김화중의 드로잉을 보면, 이미지의 경우 ‘먹방’이나 동물이 많이 등장한다. 가장 쉽게 공감을 얻어내는 퍼포먼스인 ‘먹방’은 사람들이 실제의 음식만큼이나 정보를 먹는 존재임을 알려준다.

각종 정보화기기 앞에 자의반 타의반 묶여 굼뜬 육체가 된 사람들은 충족되지 않은 욕구 때문에 먹고 싶어 하고 동시에 다이어트를 해야 하므로, 누군가 대신 먹어주는 것으로 만족한다. 동물은 위로가 되는 존재이다. 작가는 부스러기 같은 일상을 부스러기처럼 모아 놓는다. 어떤 부스러기가 어떻게 혼합돼도 큰 영향은 없는 가변적인 장이다. 한쪽에서는 계속 사라지고 있으니 넘쳐날 염려는 없다. 그것은 모더니즘부터 대세가 되었던 독백을 벗어나 대화적 태도로의 전환이다. 그러나 문자를 통한 익명의 대화는 결국 독백의 변주가 아닐까. 비록 그 독백의 주체가 갈수록 불확실해진다 할지라도 말이다. 현대인은 집단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나 홀로 칩거하려 하지만, 그러한 상황을 SNS 등을 통해 공유하려 한다. 숨어있으면서도 드러내려 하는 이중성이다. 실제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많은 공력을 온라인상의 자기연출에 쏟는다.

혼자여도 자기 감시, 자기 조절, 자기 연출은 사라지지 않는다. 대화를 가장한 독백들은 솔직한 척 하지만 솔직하지 않다. 전자거울의 방은 자기 스스로에 대해서도 무엇이 진실이가의 문제를 모호하게 한다. 일종의 중독 현상이다. 그것은 일상의 미세한 부분까지 식민화되고 있음의 징표이다. 전자거울은 수시로 자신을 비추지만, 고립된 주체의 상상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각자 나르시시즘의 세계에 칩거하며 최악의 경우에는 고장 난 정보 회로망처럼 해체되고 만다. 장 보드리야르는 가상이 실재를 뒤덮는 시대에 사회성 또한 사라진다고 했다. 디지털 아카이브가 너무나 많이 공유된다면 상상 또한 사라진다. 이러한 수많은 사라짐은 실재가 희미해지면서 연동되는 상황들이다. 실재가 가상화될 수 있다면, 가상으로부터 실재로 접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김화중은 디지털 생태계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으며, 단순한 반영을 넘어 피드백 된다. 이러한 방식은 자신도 속한 그 생태계를 미세하게나마 변모시킬 것이다. ■

 

이선영 미술평론가

 

 

이선영 미술평론가

 

이화여대 생물학과 졸업, 홍익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수료.

199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 부문으로 등단.

1996-2006년 [미술과 담론] 편집위원 역임.

2003-2005년 [미술평단] 편집장 역임.

2006년 제1회 정관 김복진 미술 이론상 수상.

2009년 한국 미술평론가 협회(이론부문)상 수상.

2014년 AICA Prizes for Young Critics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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