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WA CRITIQUE] 만져지는 전통 - 유윤빈

February 20, 2018

 탑의 인상 (연작) 185 x 98 cm 한지에 수묵 2004

 

 

유윤빈의 작품에서 오래된 탑, 소나무, 달은 마찬가지로 오래된 역사를 가지는 한국화의 재료와 기법에 실려 있다. 내용과 형식의 통일이랄까. 기법과 내용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기법은 내용을, 내용은 기법을 어느 정도 담고 있는 것이다. 예전시대에는 지금처럼 사물과 기호가, 기의와 기표가 분리되어 각각 떠돌아다니지 않았다. 그것은 모종의 질서에 의해 잘 엮여 있었다. 서양의 경우 위계질서가 잘 잡혀 있는 종교적 세계관, 동양의 경우 자연의 순리 같은 것이었을 수도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은 기성의 상징적 우주에 태어난다. 물론 상징적 우주 또한 인간에 의해 서서히 변화하겠지만 말이다. 조형 언어 역시 통상적인 언어와 마찬가지로 상징적 우주에 속해 있다. 어릴 때부터 그림을 시작한 작가에게 먹이나 붓은 모국어나 다를 바가 없다. 모국어는 애써 습득되기 보다는 자신에게 스미는 것이다. 육체와 무의식에 스며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다.

비록 엄청나게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 문화가 모국어조차도 외국어로 만드는 경향이 있곤 하지만 말이다. 유윤빈은 그녀에게 제2의 모국어라고 할 만한 한국화 분야를 오랫동안 접하고 연구하고 실행해왔다. 예고 때부터 박사학위까지 받은 학교라는 울타리를 넘어서 전문가를 찾아가 ‘무릎 제자’ --지필묵을 제대로 하기 위해 우현 송영방 선생한테 선(線)에 대한 기본적인 수련을 받았다—역할도 마다하지 않았다. 꾸준하면서도 일관된 작품들에는 예술이나 삶에 있어서 중심이나 본질을 지키고 싶어 하는 갈망이 담겨있다. 2004년 첫 개인전인 [탑의 인상] 이라는 타이틀은 현재까지도 전시부제나 작품제목으로 등장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 유윤빈은 한 우물파기에 집중한다. 그녀에게 작업이란 탑처럼 꾸준히 쌓아 올리는 것이다. 또는 탑 옆에 늘 푸른 소나무처럼 항상성을 가진다. 물론 도시의 한 켠에 구색 맞추기 식으로 심어놓은 먼지 푹 뒤집어쓰고 있는 침엽수나 키치화 되어 대량생산되는 전통도 있을 수 있다.

 

변치 않은 것이 모두 가치 있는 것은 아니다. 변화에 신중한 스타일에는 장점과 단점이 있다. 장점은 작가가 완전히 소화한 능란한 기법에 오는 안정감이고, 단점이란 큰 변화가 느껴지지 않는 점이다. 특히 후자는 ‘새로움의 전통’이 지배하는 현대에 불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장단점은 한 실체의 양면일 뿐이다. 새로움은 전통 없이는 생겨나지 않는다. 전통이라는 맥락이 없이는 새로움이 새로움으로 파악될 수도 없다. 에드워드 쉴즈 (E. Shils) 는 <전통(1981)>에서, 전통은 그 재연을 이끄는 모형이라고 정의한다. 그에 의하면 전통은 목적과 방법까지도 정의를 하는 과정을 통해 의미 있는 행위를 구성한다. 인간은 과거로부터 전해 내려온 현재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현실은 최소한 약간의 과거를 포함한다. 근현대 시대에 시간은 가속도가 붙어 현재라고 간주되는 시간대는 더욱 짧아진다. 그러나 동시에 전통이 계승되는 과정은 곧 전통의 선택이기도 하다.

그것은 전통이 어떤 모형이긴 하지만, 현재에 의해 늘 재조정되는 것임을 암시한다. 필연적인 것은 반복된다. 그렇지 않은 것은 사라진다. 살아남은 것에는 이유가 있다. 유윤빈의 작품에서 무너지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는 오래된 탑이나 기나긴 세월의 흐름을 복잡한 굴곡으로 보여주고 있는 소나무는 그러한 가치를 대변한다. 작품 속의 탑들은 대개 문화재급의 건축으로, 사회의 구성원들은 그것에 대한 관심을 가지지는 않을지언정 보존되어야 할 당위성은 인정한다. 시간이 중요하다고 해서, 자연이든 문화든 선적인 진화를 가정할 필요는 없다. 거기에는 많은 불연속이 있다. 불연속적인 어떤 사건은 기존의 지형을 재배치한다. 선적 진보가 아니라 그물망적 지형 속에서 점과 점의 관계가 변화하는 것이다. 한 시대의 어떤 작품은 그러한 불연속적인 지점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전통과 현대의 관계를 고민하는 한국화 화단의 독특함은 그 계의 구성원 누군가로 하여금 진정한 새로움이 가능할 수 있는 유익한 토양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처럼 앞만 보고 달려온 국가에서 전통은 소수의 고집 또는 소신으로만 잔류하고 있었을 뿐이다. 유윤빈의 작품에서 탑은 역사의 상징이며 소나무나 달은 자연의 상징이다. 그리고 그 모두는 인간의 상징이다. 지상에 우뚝 서있는 건축은 주체의 연장이며, 소나무는 인간의 기개와 정신을 비유하고, 달은 낭만적 자아를 떠올린다. 탑은 현대의 건물로, 소나무는 다양한 식물로, 달은 다양한 모양새로 변주되기도 한다. 탑과 소나무, 그리고 달은 마치 역사와 자연과 우주에서 하나씩 선택된 것인 양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인공적 문명, 자연, 우주 등을 함축하는 그 세 종류의 조합은 우연히 풍경 속에서 발견될 수 있지만, 서로 간의 관계를 포함한 많은 상징 가(賈)를 가지고 있다. 분석과 종합도 교차된다. 대상에 대한 실제적인 분석에 집중하는 작은 화면들이 있는가 하면, 전체적인 분위기에 방점을 찍는 것도 있다.

이미지가 담겨있는 평면 역시 입체로 변주되거나 가변적인 설치의 방식으로 확장되곤 한다. 그렇지만 소재와 기법은 십년 넘게 유지되고 있다. 특히 순지를 철망에 붙여서 만든 망 같은 구조물을 화면에 붙이는 방식이 독특하다. 이미지 위에 붙이기도 하고 붙인 다음 이미지를 만들기도 한다. 색을 칠하기도 하고, 아예 염색된 종이 층을 붙이기도 한다. 일종의 꼴라주지만, 통상적인 꼴라주 기법과 달리, 큰 이물감 없이 화면에 섞여든다. 꼴라주는 본래 재현주의에 충실한 동질적 화면에 이질성을 주입하는 역할을 했다. 입체파에 의해 처음 시도된 것으로 알려진 꼴라주로 인해 그림에는 단층이 생겨버렸다. 그러나 유윤빈의 꼴라주에서 어떤 것은 녹아드는 것처럼 자연스럽다. 바람에 살랑거리는 얇은 천처럼 드러냄과 가림이 교차된다. 가려짐이 우세할 때 화면은 불투명해진다. 정확히 무엇이 그려져 있는지, 대상들이 어떤 공간 관계를 가지는지 파악하기 힘들다. 무엇보다도 오랜 수련의 결과인 지필묵의 본질이 흐려진다. 그렇지만 심미적인 경향은 강해진다.

화면은 지시대상으로부터 자율화되어 독자적인 존재감을 강조한다. 꼴라주가 행하는 것은 모더니즘적인 역할이다. 모더니즘은 무엇보다도 언어의 불투명성을 강조하면서 화면의 물성을 드러낸다. 작가가 사용하는 순지는 닥나무 성질이 많이 남아 얇으면서도 탄력이 있어서 철망의 요철을 각인할 수 있다. 많게는 3-4겹까지 겹쳐지는 층들은 마치 바탕에서 나왔다가 바탕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것 같다. 그리기와 만들기가 복합되면서 여러 번 드리워지는 층으로 인해 화면의 복잡도는 증가한다. 이러한 복잡성으로 인해, 고정된 화면에도 불구하고 유동성의 느낌이 생겨난다. 거기에는 인공 구조물이고 자연이고 천체이고 간에 피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이 내재한다. 일종의 드로잉이라고도 할 수 있는 동양화 붓의 운용 역시 시간과의 관계 속에 있다. 캔버스가 사용되는 경우에는 먹이 스미는 맛이 좀 덜 하다. 이때에는 종이 재질의 층들이 덧입혀지고 덧붙여지면서 회화적 느낌이 강조된다.

 

 

 단 한 순간 116.5 x 91 cm 캔버스에 아크릴, 수묵담채, 한지, 콜라주 2017

 

 

유윤빈의 작품에서 전통은 어떤 특정한 시간대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 작품은 전통에 내재해 있는 시간성을 분석적으로 때로는 종합적으로 구현하고자 한다. 이때 전통은 고정된 기법이 아니라 작업하는 방식 속에 있다. 순지에 새겨진 철망의 요철무늬 역시 화면에 붙여가면서 다양하게 변형되기 때문에, 작품은 그리기와 만들기가 동시에 수행하는 셈이다. 꼴라주는 작가가 전통 어법에 가한 새로움의 요소이다. 작가는 이 기법에 대해 ‘강렬한 요철 형태를 지닌 얇은 한지로 앞선 드로잉을 덮으며 꼴라주 하는 것은, 짜임(knitting)의 막을 이용하여 싸임(wrapping)의 구조로서 표피를 형성하는 세포구조적인 요철 표현(cellulate expression)’라고 이름 붙인다. 이를 통해 ‘한지(韓紙)와 수묵(水墨)을 이용한 강약의 표현은 형태면에서 한지가 가진 섬유질의 특성을 활용하여 화면 속의 부정형(不定形)의 질감을 형성’한다. 꼴라주를 통해 야기된 촉각적 느낌은 그려진 것들을 앞으로 당겨온다. 촉각은 시각보다는 더 원초적인 감각이다.

유윤빈의 작품에서 촉각을 자극하는 꼴라주는 특정 대상과 무관하게 광범위하게 펼쳐지곤 한다. 그것은 촉각의 편재성을 강조한다. 다이앤 애커먼은 [감각의 박물관]에서 다른 감각은 특정 감각 기관에 집중되지만 촉각은 온몸에 다 퍼져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다이앤 애커먼은 [사이언스]지를 인용하면서, ‘촉각은 최초로 점화되는 감각이며 대개 마지막에 소멸한다. 눈이 우리를 배신한 뒤에도 오랫동안, 손은 세계를 전하는 일에 충실하다’고 전한다. 다이앤 애커먼은 촉각은 시각과 더불어 우리가 3차원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다고 본다. 자기감각이란 넓은 범위에서 촉각, 즉 우리가 어떻게 느끼는가와 관련이 있다. 무엇보다도 촉각은 우리에게 생명은 깊이와 모양을 갖추고 있음을 가르쳐준다. 위와 같은 촉각에 대한 과학적이고도 미학적인 연구의 맥락에서 보자면, 유윤빈의 작품에서 오래된 탑의 표면이나, 물고기의 비늘 같은 것으로 도드라져 나오게 하는 꼴라주의 기능은 조형적 역할을 담당할 뿐 아니라 자연에도 충실하다.

촉각성이라는 면에서 조형과 자연은 반대편에 놓이지 않는다. 화면 저편에 자리한 것들은 마치 만져질 듯 보다 직접적인 것으로 다가오며, 그것은 현대의 상품을 비롯하여 많은 대상들이 진화한 방향이었다. 눈만으로는 부족하다. 시각성에 기반 하는 첨단 과학은 인간의 여러 감각 중에서 촉각을 최후에 정복할 영역으로 남겨두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회화는 코드화한 이미지, 가령 가상현실(VR) 기술 같은 것이 아무리 발전해도 살아남을 것이다. 탑과 유영하는 물고기의 만남 ‘泳의 印象’ 전(2006)과 ‘인상’ 전(2007)에서의 작품 [탑의 인상](1999-2004)과 [泳의 印象](2005-2007)은 탑, 또는 물에 비친 탑에 물고기가 헤엄치는 풍경인데, 순지 꼴라주가 탑의 표면과 물고기 비늘과 비슷한 질감을 연출한다. 여기에서 순지 망은 하늘 또는 물을 하나의 계로 융합시킨다. 최근 작품 [단 한순간](2017)과 [빛나지만 번쩍거리지 않는다-광이불요(光而不耀)](2017)는 캔버스에 아크릴과 수묵담채, 한지 꼴라주 등 복합적인 기법으로 그려졌다.

여기에서 꼴라주는 달의 자세한 지형까지 보이는 천체의 지형적 질감을 표현한다. 2017년 작품 [탑의 인상] 역시 광물적 표면이 꼴라주로 강조되어 있다. 꼴라주는 동양화로 치면 여백에 해당되는 부분에도 광범위하게 걸쳐 있다. 탑 옆에 함께 있곤 하는 매화를 비롯한 식물들은 질감 면에서는 대조적이다. 작가는 여기에서 견고함과 부드러움, 과거와 현재를 대조하고자 했다. 식물의 경우에는 단순히 전통적 어법을 넘어서 사실주의적이다. 사실적 방식은 동질성에 이질성이 삽입될 수 있는 지(시)점을 부여할 것이다. 그것은 꼴라주와 같은 위상을 가질 것이다. 문예사조사에서의 대표적 사건은 중세에서 르네상스로의 변화일 것이다. 이때 (과학적)경험이 (종교적)상징을 변화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전환에서 사실적 방식은 상상과 구별되지 않는다. 없었던 것이 나타나는 과정에서 사실은 상상으로 간주된다. 상상은 시간이 흐른 후 사실로 공유된다. 유윤빈의 작품은 전통적 기법에 충실하고, 때로 사실에도 충실함에도 불구하고 환상적인 면이 있다.

그것은 전통이 너무 소원해져서 생기는 이질감일 수도 있다. 단기간에 걸쳐 나름대로 물질적 발전주의의 대가를 누리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자연이나 전통, 또는 그것에 기반 한 예술의 가치가 보편적으로 공유되기에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꼴라주는 시간이 문명과 자연에 찍어놓은 인장과 같으며 작가는 이러한 것들에서 받는 인상(印象)을 표현한다. 그러나 유윤빈의 작품에서 꼴라주는 모든 작품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탑과 설송, 또는 설매의 만남이 있는 풍경, 또는 소나무만 그린 작품은 꼴라주 없이 전통적인 방식으로 그려졌다. ‘솔바람’ 전(2014)에서 다양한 각도로 몸을 트는 설송은 오래된 성곽과 어우러지고 상투를 튼 선비가 있기도 한다. ‘송하보월(松下步月)’ 전(2015)에서 등장하는 고풍스런 인물은 단원 김홍도이다. 여기에서 작품 [단원 김홍도-설리화송](2014)은 김홍도가 설송 아래 앉아서 설송을 그리는 그림이다. 그리기의 이상향처럼 다가오는 이 작품은 이전의 위대한 화가에게 자신을 투사하는 모양새다. 그것은 일종의 그림에 대한 그림으로, 작가가 내용보다는 기법에 더 많이 쏟는 관심을 알려준다. ■

 

이선영 미술평론가

 

 

 

이선영 미술평론가

 

이화여대 생물학과 졸업, 홍익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수료.

199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 부문으로 등단.

1996-2006년 [미술과 담론] 편집위원 역임.

2003-2005년 [미술평단] 편집장 역임.

2006년 제1회 정관 김복진 미술 이론상 수상.

2009년 한국 미술평론가 협회(이론부문)상 수상.

2014년 AICA Prizes for Young Critics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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