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WA CRITIQUE] 현실과 유토피아, 내 안의 나를 담다 - 권주안

March 15, 2018

노아의 방주 194 x 339 cm Acrylic, oil, wallpaper on canvas 2013

 

1. <지하생활자의 수기>에 등장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는 실현 불가능한 망명의 존재이다. 인간 본성의 어둡고 야만적인 상황의 목도와 고독, 자유, 정체성, 구원으로서의 사랑 등을 폭넓게 담아낸 <지하생활자의 수기>는 체르니솁스키의 이성적 이기주의와 허무주의, 사회주의적 유토피아로부터 전이된 열매이지만, 개연성 면에선 가스통 바슐라르가 <촛불의 미학>에서 설정한 인물과 동일한 동선에 놓인다. 그 또한 어느 곳 하나 기댈 곳 없고, 고독의 환유는 거주하나 고독에의 저항은 불가능한 사람이다. 촛불을 앞에 두고 밤새워 홀로 글을 쓴다. 적막함 혹은 고요함과 함께 촛불만이 그의 친구이다.

어쩌면 예술은 고독에서 벗어나기 위한 투쟁이면서 동시에 그 투쟁만으로도 예술의 고립성을 내재한다. 아니, 본래 인간은 고독할 수밖에 없다는 전제도 가능하다. 근본적으로 어느 누구도 생과 죽음, 여생의 이유를 알 수 없기에 그렇고, 주어진 삶이지만 선택한 삶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린 그저 운명과도 같은 시간의 순연을 섬길 뿐이다.

다만 <촛불의 미학>에서처럼 범인은 세상 모든 것에 그러려니 하고 살아갈지라도 예술가는 그것을 시와 글과 그림으로 표현한다. 앞서 “예술은 고독에서 벗어나기 위한 투쟁이면서 동시에 그 투쟁만으로도 예술의 고립성을 내재한다.”는 문장이 암시하듯, 그들은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달리 고독의 성벽을 타고 오르며 역경 속에 놓인 기회의 섬을 발견하는 능력과 자기 찾기를 통해 고독을 떨쳐낼 수 있는 지혜로움으로 자신의 세계를 타인의 세계와, 타인의 세계를 자신의 세계로 치환하곤 한다. 그리고 우린 권주안의 작품 속에서 그 작은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

실제로 작가의 여러 그림들은 현실과 이상 사이의 거리감에 대한 고민으로 읽힌다. 느릿한 화면, 정적인 발화를 통한 작가 자신과 관련한 불투명성에 대한 의미심장한 기록이랄 수 있다. 물론 현실과 이상의 괴리, 오를 곳에 대한 기대를 일축한 ‘바벨탑’(2013)이나, 자신을 구원해줄 대상과 시공간에 대한 초월성을 스스로의 코멘터리 (commentary) 로 담아낸 ‘노아의 방주’(2013) 마냥 중간계의 어느 곳에 서 있다는 메시지도 녹아 있다.

그의 그림 속 현실을 기반으로 한 인위적 설정, 다시 말해 이상향으로 인도하는 매신저인 배와 새를 비롯해, 사자, 계단, 깃발, 나무와 같은 일상적 사물이 지칭하는 상징성은 하나의 배역이 담긴 대본이자 삶의 방향을 지정하는 시놉시스의 일부이다. ‘체스게임’(2013)에서 드러나듯 개인의 역사와 삶 속에서 생겨난 경쟁, 상처, 혼돈, 절망의 이미지이면서, 그 이미지들은 소통의 요구와 희망에 대한 대체어이다. 즉, 오이디푸스 신화의 스핑크스 질문에 대답해야할 처지이자 ‘공중정원’(2013)이 가리키는 치유의 방편임을 담보하는 매개인 셈이다. (참고로 스핑크스의 어원은 ‘교살하다’ 라는 뜻을 지닌 ‘strangle’ 이다. 이는 답하고 부정하는 가운데 존재하는 삶을 말한다.)

 

2. 무언가 공허한 듯 서 있는 얼룩말과 기하학적 구성의 배경, 서로 원만하게 연결되지 못한 이 이질적인 풍경은 작가의 마음 혹은 심리를 대리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우회적으로 표출된 화자의 불편한 심정과 더불어 어떤 나침반을 유보토록 하지 않는다. 특히 어디서든 등장하는 얼룩말은 일종의 미지와 현실이 상존하는 정적인 자신을 드러내는 기표로 의심 없도록 한다.

다만 이 모든 것들은 대체로 몽환적인 매직리얼리즘 (magic realism) 식 구성 아래 전개되고 ‘날아오르기’(2010), ‘이정표’(2013)처럼 무겁지 않은 어떤 특정함, 스스로를 옥죄는 규율에 대한 상태와 결과를 평범하지 않게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그리고 그것은 개념상 권주안 작품들이 지닌 특징들을 함축하는 언어로 규정된다.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형상 (形象) 가운데 가장 눈여겨봐야할 것은 바로 얼룩말이다. 화면 전반을 지배하는 파스텔톤의 색깔들과 얼룩말은 밸런스를 이루고 분할된 화면은 조용하면서도 차분한 인상을 심어준다. 언뜻 보면 동화 (童話) 적이고 몽환적인 여운이 강한 게 사실이지만 이 얼룩말이 생성하는 인상은 이미지의 주체성을 담보한다. 작품 어느 부분에 시선을 두던 종국엔 그 얼룩말에 멈춰지고 말 정도다.

그의 얼룩말은 크거나 혹은 작은 모습으로 공허한 공간에 곧잘 놓인다. 가끔은 전부가 아닌 부분으로, 한 마리나 두 마리로 그려지곤 한다. 그러나 이 얼룩말이 단순히 스토리를 내레이션 하는 역할에 머물지는 않는다. 사실 얼룩말은 권주안 작품을 이해하는 가장 효율적인 단초이며 그의 그림들을 구축하는 대표적인 알레고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나는 누구인가’, ‘지금 내 안에 있는 무엇인가’ 라는 작가의 주문 또는 독백의 기호에 가깝다. 나아가 얼룩말엔 현실과 자아의 충돌, 갈등, 번민 등이 새겨져 있고, 그 충돌과 갈등과 번민이 하나의 기호로 나타나고 있다.

물론 얼룩말은 미로와 같은 길에서 하루하루의 현실적인 문제들을 담담하게 맞닥뜨리며 살아가지만 내재된 무언가는 끝내 해소되지 않는 의문, 인생사에 관한 고뇌, 매 순간마다 다가서는 감정의 복선들이라 해도 틀리지 않다. 2018, 2017년도 개인전에서 선보인 근작들과 과거의 작품전에 출품된 작품들은 거의 동일한 맥락이다. 그런 차원에서 볼 때 권주안의 얼룩말은 자신의 투영이지만, 결국 우리네 일상에 놓인 보편적 ‘삶의 여정’ 을 대변하는 미지 혹은 예지적 심벌, 작가 자신의 진실한 초상을 가두고 있는 기호라는 게 옳다.

 

 

긴 여정 40x70cm Pigment print on Canvas 2016

 

3. 권주안의 작품에선 동물과 사물이라는 특정한 모티브 외에도, 그 주변에 부유하는 미학적 공기 역시 감지해야할 대상으로 남는다. ‘미학적 공기’라고 표현하니 다소 어렵게 들리겠으나 사물과 의식을 공유하게 하는 감성적 관계로써의 조형원리를 생각하면 쉽다. 즉, 그의 작품들을 보다 분석해보면, 감성을 통해 순수한 형체를 지향하고 열린 감각을 엄격하게 구현함으로써 조형적 방법을 심화한다는 의미다.

‘미학적 공기’는 형상 외에도 꿈과 현실이 착종 (錯綜) 된 공상적, 몽환적 (夢幻的) 인 여운까지 포함한다. 형상, 여백, 감성, 여운까지 더해져 만들어진 결과물인 셈이다. 하지만 작가가 작품을 창작함에 있어 어떤 특정한 경향이나 흐름을 고의적으로 활용하는 의도성은 없다. 비평가의 입장에서 풀어낼 때 그러한 흔적을 감지할 뿐, 작가는 그저 심연 (心淵) 의 이야기를, 감정이입이 뚜렷한 자신의 이야기를 일기 쓰듯이 펼쳐놓을 따름이다.

필자의 생각에 작가 권주안은 그림을 통해 자신의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극복하려는 듯싶다. 그 방법으로 경험과 주관적 의식을 작품 속에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이입하는데 주력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다양한 감정과 충동이 현실이라는 외계와의 중개자 역할을 하는 그림으로 사회적 규범에 따라 주어지는 개인 내부 정사 (正邪) 의 의식을 미적 표현으로 소화하려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러한 판단이 딱히 그릇되다 여겨지진 않는다. 작품 하나하나 마다 새겨져 있는 많은 상징과 기호 같은 도상들이 그것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그림 속에 담긴 스토리가 종착으로 하는 지점은 궁극적으로 ‘나’ 라는 존재성의 검증에 있음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또한 작가는 이 검증의 과정을 그림으로 기록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아무튼, 일상을 바탕으로 한 소소할 수 있는 감정들이 풍부한 미감으로 묻어나는 그의 그림에서 작가의 본래 모습을 재차 발견하는 건 어렵지 않다.

다만 이 평론을 작성하며 찬찬히 되짚어 보건데, 그의 그림은 장식적일 만큼 지나치게 단정한 맛이 있다. 멀리 보면 시대상을 이해하고 웬만한 지침 하나만 있으면 거의 해석이 가능한 르네상스시대의 그림처럼, 친절한 도상, 의식해야만 할 것 같은 이미지로 채워져 있다. 이것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그림 자체보다 설명이나 각주가 더 소중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예술은 장식도 아니고 설명서도 아니다. 또한 나의 이야기가 누구에게나 공감을 주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권주안 앞에는 극복할 무언가가 놓여 있다.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는 작가가 가장 잘 알고 있다.

마지막으로 10여년 가까이를 (이미지든 내용이든) 하나에만 천착한다는 것은 동시대적이지 못하다. 세상은 가파르게 변하고, 예술은 시대에 대한 예술가의 반응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꽤나 진부한 (좋게 말하면 고집스러운, 허나 예술가가 장인은 아니다) 접근이다. 때문에 권주안에겐 용기가 필요한지도 모른다. 용기는 침묵의 습속과 무모함의 중간이다. 문제는 시간이 그리 여유로운 건 아니라는 점이다. ‘숨어있기 좋은 방’ (2013) 은 잠시의 안위를 허락하겠지만, 그곳에서‘이정표’(2013)를 발견할 수는 없는 탓이다.

- 홍경한 미술평론가

1) 제 아무리 물신에 찬 환경과 야망에 사로잡혀 산다한들, 욕망과 이상의 마찰음과 번잡스러운 형색을 뚫고 어느 궤도에 안착한다한들 인간은 근본적으로 끈질기게 똬리 붙는 공허함과 외로움을 떨쳐내긴 힘든 게 사실이다.

 

2) 실제로 작가는 자신의 작가노트에 “본인의 작품은 현실과 유토피아의 중계 공간을 표현하고 있다. 각각의 작품은 제목에서 보여 지는 것처럼 서로 다른 내용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지만, 모두 이상향을 향한 욕망을 담고 있다. 현실에서 겪는 여러 어렵고 힘든 상황으로부터 탈출하고자 도피처를 찾게 되었고 그것이 작품 속에 다양한 구조물들을 만들게 하였다. 작품마다 각기 다른 형태로 표현 된 구조물들은 본인이 꿈꾸는 이상향으로 통하는 출입구가 되어준다. 현실과 이상향의 두 공간을 연결하는 중계 영역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3) 작가는 “얼룩말로 대치된 본인은 가상 여행을 합니다. 얼룩말은 본인이 바라는 문지기일 수 도 있고 안내자 일 수 도 있으며 이상향으로 향하는 주체 일수도 있다. 즉 얼룩말이 본인이고 본인이 곧 얼룩말인 것입니다. 자신과 동일시된 얼룩말을 본인이 꿈꾸는 이상향의 입구에 위치시키고 얼룩말로 하여금 자신의 욕망이 성취되길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얼룩말은 언제나 본인이 원하는 자리에서 이상향을 향해 나갈 준비가 되어있다.”라고 말한다.

 

4) 한편으로 이는 레알리자시옹(rèalisation)으로, 배경 공간구성에 대한 관점에선 구성주의(constructivism)를 연상토록 한다.

 

5) 사실 권주안이 필자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전체의 절반도 안 된 듯하다. 그만큼 그의 마음속에는 차마 입으로는 꺼내지 못한 현실의 아픔과 갈등이 보다 깊게 내재되어 있어 보인다.

 

6) 감성적인 관찰안(觀察眼)에 의한 정체성의 기록, 그로 인한 사색성은 마치 스위스의 철학자 앙리 프레데릭 아미엘의 일기에서 느껴지는 여백과 닮았음을 인지하게 한다. 그럼에도 그의 그림에선 보다 특별한 다른 두 가지 고통과 해답을 동시에 관찰할 수 있다. 작가는 자신의 그림을 통해 인생에 있어 후회의 고통과 예술에 있어 훈련의 고통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엿보이고 있다. 육중할 수 있는 ‘후회의 고통’을 벗어 던지려 함이 그 하나이며, 예술가의 길에 놓인 번민과의 싸움을 ‘훈련의 고통’으로 덤덤하게 받아들이려는 행동이 또 다른 하나이다.

 

 

 

홍경한 미술평론가, 강원국제비엔날레 총감독

강사 홍경한은 미술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다. 대림미술관 사외이사, 인천아트플랫폼 운영자문위원, 박수근미술관 운영위 등을 역임하고 있다. 월간 <미술세계>, 월간 <퍼블릭아트>, 시각예술저널 <경향 아티클> 등, 국내 주요 미술잡지에서 오랜 시간 편집장을 맡아왔으며, 국립현대미술관 자문위원, 부산비엔날레 집행위원, 서울시립미술관 전시평가위원 등을 지냈다. 저서로는 교양서인 『민주주의와 리더십이야기』를 비롯해, 미술평론집 『기전미술』, 문화예술 비평집 『고함』 등이 있다. 주간경향, YTN, 대구신문, 메트로신문 등에 고정적으로 칼럼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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